3·1문화상 받은 '무용계 원로' 김백봉 경희대 명예교수 "기쁨으로 승화시킨 우리 춤 인정해줘 기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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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춤' '화관무' 등 600여편 발표
무용가 최승희의 애제자이며 동서
"춤이란 등불이 희망 놓지 않게 해 줘"
무용가 최승희의 애제자이며 동서
"춤이란 등불이 희망 놓지 않게 해 줘"
“난 밝고 행복한 춤을 추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라가 어려운데 화려한 옷을 입고 웃으며 춤을 추는 게 어디 있느냐’고 욕을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내 춤은 사람의 모든 감정을 기쁨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6·25전쟁을 통해 그 전엔 상상하지 못한 징그러운 세상을 봤고, 그 전후로도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어요. 그래도 춤이 있었기에 나라는 존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이자 ‘한국 무용계의 원로’로 추앙받는 김백봉 경희대 명예교수(90·사진)는 최근 서울 평창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같이 말했다. 김 명예교수는 ‘부채춤’ ‘화관무’ 등 창작물 600여편을 발표했다. 1947년 초연된 화관무와 1954년 초연된 부채춤은 일반인에게도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은 이 춤을 김 명예교수가 안무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왜 다른 나라 춤에는 당연히 남겨져 있는 안무가 이름이 우리 춤엔 없느냐고요? 가장 큰 이유는 춤을 추는 사람을 천시했기 때문입니다. 무용가를 제대로 대접하는 사회가 아니었어요. 그러다 보니 춤의 이름과 동작만 남았고, 누가 췄는지는 제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김 명예교수는 스승이자 손윗동서인 최승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최승희의 남편이자 월북 문인인 안막(본명 안필승)은 김 명예교수의 남편인 고(故) 안제승 경희대 교수의 형이다. 김 명예교수와 안 교수 부부는 1946년 최승희·안막 부부와 월북했다가 북한의 잦은 간섭과 숙청 위협을 피해 1951년 1·4 후퇴 때 서울로 돌아왔다. 김 명예교수는 최승희를 ‘형님’ 대신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게 편하다”고 했다.
김 명예교수는 “10대 시절 선생님 문하에 들어갔을 때 계속 몸을 반듯하게 세우고 호흡하는 훈련을 했다”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발레의 기본 동작이었다”고 회상했다. “선생님은 발레든 현대무용이든 상관없이 어떤 춤이든 소화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야 비로소 우리만의 춤을 되살릴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나도 제자들에게 항상 호흡을 강조합니다. 호흡과 동작이 서로 맞지 않으면 춤의 흐름이 끊어지니까요.”
김 명예교수는 1일 재단법인 3·1문화재단(이사장 김기영)으로부터 제58회 3·1문화상 예술상을 받았다. 그는 “상을 받아서 기쁜 이유는 이제 우리 춤이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차원의 대우를 받게 됐다는 걸 실감하기 때문”이라며 “가족과 제자들, 춤을 아껴 주는 모든 사람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난 그저 춤만 출 줄 알았어요. 춤으로 돈을 버는 방법은 몰랐지요. 살아생전에 우리 춤이 정식 학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게 그저 행복할 뿐입니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우리 춤에 관심을 갖고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이자 ‘한국 무용계의 원로’로 추앙받는 김백봉 경희대 명예교수(90·사진)는 최근 서울 평창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같이 말했다. 김 명예교수는 ‘부채춤’ ‘화관무’ 등 창작물 600여편을 발표했다. 1947년 초연된 화관무와 1954년 초연된 부채춤은 일반인에게도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은 이 춤을 김 명예교수가 안무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왜 다른 나라 춤에는 당연히 남겨져 있는 안무가 이름이 우리 춤엔 없느냐고요? 가장 큰 이유는 춤을 추는 사람을 천시했기 때문입니다. 무용가를 제대로 대접하는 사회가 아니었어요. 그러다 보니 춤의 이름과 동작만 남았고, 누가 췄는지는 제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김 명예교수는 스승이자 손윗동서인 최승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최승희의 남편이자 월북 문인인 안막(본명 안필승)은 김 명예교수의 남편인 고(故) 안제승 경희대 교수의 형이다. 김 명예교수와 안 교수 부부는 1946년 최승희·안막 부부와 월북했다가 북한의 잦은 간섭과 숙청 위협을 피해 1951년 1·4 후퇴 때 서울로 돌아왔다. 김 명예교수는 최승희를 ‘형님’ 대신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게 편하다”고 했다.
김 명예교수는 “10대 시절 선생님 문하에 들어갔을 때 계속 몸을 반듯하게 세우고 호흡하는 훈련을 했다”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발레의 기본 동작이었다”고 회상했다. “선생님은 발레든 현대무용이든 상관없이 어떤 춤이든 소화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야 비로소 우리만의 춤을 되살릴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나도 제자들에게 항상 호흡을 강조합니다. 호흡과 동작이 서로 맞지 않으면 춤의 흐름이 끊어지니까요.”
김 명예교수는 1일 재단법인 3·1문화재단(이사장 김기영)으로부터 제58회 3·1문화상 예술상을 받았다. 그는 “상을 받아서 기쁜 이유는 이제 우리 춤이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차원의 대우를 받게 됐다는 걸 실감하기 때문”이라며 “가족과 제자들, 춤을 아껴 주는 모든 사람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난 그저 춤만 출 줄 알았어요. 춤으로 돈을 버는 방법은 몰랐지요. 살아생전에 우리 춤이 정식 학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게 그저 행복할 뿐입니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우리 춤에 관심을 갖고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