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국격은 여유와 배려에서
프랑스 유학 시절 겪은 일이다. 출입문을 지날 때마다 앞서가던 사람이 흘깃 뒤를 돌아보고 문을 잡아주곤 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뒷사람을 배려한다는 사실에 크게 감동받았다.

다른 기억도 있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 아무리 줄이 길어도 승객이 모두 내리고 난 후 순서대로 한 사람씩 지하철에 타던 모습이다. 얌체 행동을 하는 사람은 어느 사회에나 있다. 이때는 승객이 먼저 내린 뒤 타야 한다고 지적해 먼저 탄 승객이 열차에서 내리는 광경도 봤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의식은 선진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힘이다. 이는 미국 9·11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침묵 속에 줄지어 걸어 나와 많은 생명을 살린 원동력이 됐다.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우리 질서의식도 성숙했음을 느낀다. 줄서기는 기본이 됐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사람들은 문 양편으로 줄을 서 기다린다. 아무런 표시가 없는 버스 정류장에서도 버스 노선별로 자연스레 줄이 만들어진다.

물론 주위 사람 신경 쓰지 않고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 새치기하는 사람, 공원에서 자신이 머무른 자리를 정리하지 않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서서 질서를 지켜달라고 지적하기는 쉽지 않다.

대신 우리는 묵묵히 자신의 몫을 다하는 것으로 지적을 대신한다. 주변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고, 누군가 새치기를 하더라도 급한 사정이 있으리라 이해하며 흔쾌히 양보한다. 공공장소에서 자기가 버린 쓰레기가 아니어도 자리를 정리하고 가는 사람도 많아졌다.

우리 사회는 경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서기 위해 참 많은 노력을 했다. 부모 세대는 전쟁 직후 폐허와 같았던 나라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키워냈다. 최소한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물질적 풍요를 갖추는 일은 앞선 세대의 간절한 꿈이었다.

이제는 주변을 배려하고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는 의식의 풍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공공장소에서 질서를 지키는 일은 주위를 배려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일이다. 마음속에 배려의 거울로 주변 사람을 비추어 보는 것만으로도 열린 문을 잠시 붙잡고 기다려주는 여유를 갖게 된다.

지금까지 교육이 ‘난 사람’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부터는 ‘제대로 된 사람’을 키워야 한다. 타인을 이해하는 한 사람의 시민이 ‘나부터 질서를 지키자’는 여유와 배려를 공동체에 전파한다. 시간이 지나면 여유와 배려의 문화가 나와 내 후대가 살아가는 국가의 품격을 만들어낼 것이다.

강정애 < 숙명여대 총장 kangjap@sm.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