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사동 갤러리 밈에 전시된 이기영 화가의 ‘화이트 포레스트(240×600㎝)’.
서울 인사동 갤러리 밈에 전시된 이기영 화가의 ‘화이트 포레스트(240×600㎝)’.
천장까지 닿는 큰 캔버스에 그려진 먹의 강렬한 움직임에서 강한 생명력이 뿜어져 나온다. 흑백의 두드러진 대비에서 살아 숨쉬는 자연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밈에서 열리고 있는 초대전 ‘화이트 포레스트’에 전시된 화가 이기영 이화여대 동양화과 교수(51)의 작품 ‘화이트 포레스트’에서다. 이번 초대전에는 올해 이 교수가 새로 그린 작품 12점을 선보인다.

이 교수는 먹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전통적인 동양화의 개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자연의 경외감’을 표현한다. 그의 그림에는 시간이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이 풍긴다. “자연 앞에 서면 왜 경이로운 마음이 들까요. 자연 속에는 성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나무 기둥의 마디, 바람에 깎인 돌, 새로운 잎사귀처럼요. 세월의 흔적을 나열하면 자연 앞에서 느끼는 감정을 내 작품 앞에서도 느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화이트 포레스트’를 그렸습니다.”

1999년 처음 그린 ‘화이트 포레스트’는 그의 대표 연작으로 자리잡았다. 먹으로 작업했지만 두꺼운 질감이 느껴지기는커녕 먹이 스치고 지나간 듯 형상은 아주 얇게 표현됐다. 작품은 오히려 흑백사진처럼 느껴진다. 이 교수의 작업 방식 때문이다. 그는 석회나 대리석 가루를 갠 반죽을 한지 위에 여러 번 발라 바탕을 만든다. 주필(대나무 붓)을 이용해 한 달 정도 묵힌 폐묵(썩은 먹)으로 형상을 그린 뒤 먹이 종이에 스며들기 전 물로 씻어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마지막엔 사포질을 해 표면을 매끈하게 한다. 색이 바래고 형상이 지워지는 과정을 통해 자연 그 자체를 표현한다.

이번 전시에선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한 자전적 작품도 처음 선보인다. 이 교수는 먹으로 그린 꽃으로 유명해졌다. 피고 지는 것이 숙명인 꽃을 통해 시간의 순환을 표현해내며 ‘먹꽃 화가’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교수의 작품 대상은 꽃에서 숲으로, 숲에서 자기 자신으로 바뀌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나의 흔적’을 들여다보는 것 역시 세월의 흐름을 표현하려고 했던 그동안의 예술적 의도와도 부합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6년 전부터 고통스럽게 겪어온 매너리즘이 작가의 내면을 작품으로 표현하게 된 계기가 됐다. “자연의 흔적과 세월을 표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지만 자연과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괴감과 공허함에 허우적거렸습니다. 그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즉흥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그렸습니다.” 전시는 다음달 4일까지.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