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통상무역 갈등이 데이터 보안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 자율주행차,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좌우하는 핵심 자원인 개인정보 등의 데이터를 놓고 패권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미·중 간 데이터 구축 패권 싸움이 거세지면서 정보기술(IT) 기업에 대한 규제 장벽도 높아질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자율주행·AI·빅데이터 기술 '무기화'… 미·중, 규제장벽 더 높게 쌓는다
자율주행차가 무기화된다?

15일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중국 최대 인터넷기업인 바이두의 루치 최고운영책임자(COO) 겸 자율주행프로그램 대표는 “자율주행차가 외부 세력이 조종하는 ‘무기’로 쓰일지 모른다는 각국의 공포가 커지고 있다”며 “외국 자율주행차 기업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루 COO는 지난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자쇼(CES)에 참석해 이 같은 우려를 쏟아냈다. 각국 정부가 외국의 자율주행차량 기업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일 수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자율주행·AI·빅데이터 기술 '무기화'… 미·중, 규제장벽 더 높게 쌓는다
그의 발언은 미·중 데이터 보안 갈등이 고조된 상황에서 나온 것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미국 2위 이동통신사 AT&T는 지난 8일 중국 화웨이의 최신 스마트폰 판매 계획을 돌연 취소했다. 다음날 CES에서 판매 계약 체결 사실을 발표하는 이벤트를 열 예정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중국 경계 심리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미국 하원은 2012년 화웨이 통신장비가 중국 정부의 첩보수집과 관련됐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제기한 바 있다.

지난 2일엔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그룹 산하 앤트파이낸셜이 미국 송금업체 머니그램의 인수합병(M&A) 계획을 철회한다고 밝혔다. 알렉스 홈즈 머니그램 최고경영자(CEO)는 “미국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가 이번 인수를 허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졌다”고 M&A 무산 이유를 설명했다. CFIUS는 앤트파이낸셜의 전자결제서비스 알리페이 이용자가 자동으로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한다’는 조항에 동의하게 한 구조를 문제삼았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15일 알리바바와 화웨이를 상대로 한 미국의 공세가 인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며 중국은 기본적인 규칙과 질서 유지를 위해 대응책을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매체는 트럼프 행정부가 표면적으로는 국가안보 이유를 들고 있으나 최종 목표는 ‘미국 기업 보호’라고 비판했다.

미국, 데이터 유출 경계령 본격화

미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중국 기업이 AI와 빅데이터 등 첨단기술과 정보를 보유한 미국 기업을 잇달아 인수했기 때문이다. 컨설팅기업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에 따르면 중국 기업의 해외 M&A는 2016년 923건(2209억달러)으로 전년의 382건(639억달러)에 비해 급격히 증가했다. 국가별로는 북미(33%)와 유럽(42%) 등 첨단기술을 보유한 선진국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중국의 AI 관련 기업 수(2016년 기준)는 709개로 미국(2905개)에 이어 세계 2위다.

해외 기업 M&A는 중국이 이른 시간 안에 선진국의 첨단기술을 확보하고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데 용이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중국은 2014년 정부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하는 해외 M&A 규모를 ‘1억달러 이상’에서 ‘10억달러 이상’으로 높여 중국 기업의 M&A를 도왔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차이나머니’에 대한 경계령이 본격화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CFIUS 권한을 강화하는 법안이 미 의회에 제출됐다. 미국인의 개인정보와 유전자 정보가 외국 정부 또는 기업에 넘어가지 않도록 엄격하게 심사하는 규칙이 포함됐다. CFIUS의 심사 대상도 기존 군사와 반도체 등 국가 안보에 직결되는 기업에서 개인 데이터를 다루는 기업의 인수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CFIUS가 기존에 승인한 계약을 소급해 재검토하고 효력을 중단할 수 있게 하는 권한도 부여했다. 사실상 중국 기업의 M&A를 저지하기 위한 법안이다.

중국도 데이터 통제 맞대응

미국이 국가 안보를 이유로 중국 기업의 투자를 연이어 막자 중국 정부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국도 각종 규제로 외국 기업의 정상적인 투자를 막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국은 지난해 6월부터 사이버보안법을 시행 중이다. 인터넷 공간의 주권과 국가 안전 유지를 명목으로 도입된 이 법은 외국 기업의 중국 내 서비스를 정부가 검열, 통제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법으로 인해 애플은 중국 앱스토어에서 인터넷 검열시스템을 우회하는 가상사설망(VPN) 관련 앱(응용프로그램) 60여 개를 삭제했다. 아마존웹서비스(AWS)도 지난해 11월 중국사업부 자산을 매각하고 클라우드 시장에서 철수했다.

중국은 글로벌 기업들이 영업 활동의 일환으로 수집한 상업 데이터를 해외로 반출하는 것도 허가를 받도록 했다. 지난해 12월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통상 관료들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서 특정 국가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중국을 겨냥해 인터넷 규제와 보호주의적 산업정책을 규탄하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이설/박상익/허란 기자 solidarit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