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공룡능선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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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설웅 < 에스디생명공학 대표이사 swparkyi@sdbiotech.co.kr >
![[한경에세이] 공룡능선의 비극](https://img.hankyung.com/photo/202008/07.23098805.1.jpg)
새벽 3시께 헤드랜턴을 켜고 산을 오르는 일정이라 랜턴 불빛 이외에는 칠흑 같은 어둠만 있었다. 산행 중 설악폭포의 물소리도 청각으로만 듣기 아까워 랜턴으로 주위를 비춰보았지만, 역시 폭포의 형체는 알아보기 어려웠다. 비록 비구름으로 인해 일출은 못 보았지만, 발아래 구름으로 인해 산 아래 경치가 구름뿐이었지만, 정상에서의 희열을 느끼고는 감격에 겨워하기까지 했다. 이내 대청봉 정상의 바람이 구름을 밀어내고 설악산 전체 비경을 한눈에 들어오게 하기도 했다. 얼른 사진을 찍었다. 지금 안 찍으면 이런 광경은 잊어버릴지도 모르는데 실제 기억을 못 하면 너무 아까울 것 같다.
정강이 부위엔 상처가 난 모양인데 찰과상이 있는 듯했다. 이정표에는 비선대까지 내리막으로 800m 남았다고 쓰여 있었다. 왜 이리 긴지 괜히 이정표 거리가 잘못됐을 거라고 투덜거렸다. 한 발 한 발이 천근만근이라는 표현이 이런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리라.
기억을 더듬어 보면 6년 전 같은 산행에서도 같은 고통을 느꼈던 것 같다. 그때도 마등령 하산 길의 돌부리와 돌계단 하나하나를 이렇게 원수같이 느꼈으리라.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다. 힘들었던 순간이 모여 과거의 행복한 기억으로 재구성됐을 텐데, 6년 전 산행을 즐거운 추억으로만 기억했던 것이다. 이번 산행의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친구들과의 즐거운 추억, 사진 속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잊힐지도 모른다.
마등령에서 하산하면서 돌계단의 어려움과 실제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던 이정표의 표시가 내 기억 속에 비극으로 각인된 지 하루도 안 됐다. 정강이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필건이 단체 대화방에 제안한다. “다음에는 지리산 종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