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英 빅토리아 박물관에서 헤매는 '한류'
먹는 것에 진심이지만 뷔페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다. 차려진 음식을 보면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것저것 먹고 나면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차라리 정성껏 끓인 곰탕 한 그릇, 냉면 한 그릇이 더 오래 각인된다. 우리가 ‘맛집’이라고 부르는 모든 식당엔 시그니처 메뉴라고 부르는, 잊지 못할 어떤 맛이 존재한다.

과장된 비유일 수 있지만 미술관과 박물관도 그렇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전시회가 매일 열리지만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전시엔 공통점이 있다. 잘 몰랐던 것을 깊게 알려주거나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온전히 새롭게 보게 만들어주는 것. 그래서 좋은 전시를 보고 난 뒤엔 지적인 희열이나 미적인 감동이 찾아온다. 맛집의 그 어떤 맛과 같이 하나의 이미지가 오래 남아 시간이 흘러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토요칼럼] 英 빅토리아 박물관에서 헤매는 '한류'
지금 영국 런던에서 열리고 있는 ‘한류! 더 코리안 웨이브’ 전시라는 게 있다. 장소는 1852년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경의 이름을 따 만든 세계적인 박물관 빅토리아앤드앨버트(V&A) 뮤지엄이다. 지난달 24일 개막해 장장 9개월간 열린다. 한류를 주제로 170년 역사의 권위 있는 박물관에서 열리는 첫 전시라니, 내심 기대가 컸다. 마침 런던의 대형 아트페어가 열리는 기간이라 비슷한 생각을 한 한국인이 많이 찾았다. 단체 관람을 온 현지 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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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참극이었다. 전시는 싸이 ‘강남스타일’의 우렁찬 음악으로 시작한다. 동시에 ‘한류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전시의 기획 의도는 이렇다. ‘한국이 세계의 팝문화에 가장 주도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 음악 등 대중문화를 통해 한류의 본질을 파헤쳐보는 것.’

거창한 기획 의도와 전시는 괴리가 컸다. 백남준의 대작 ‘미라지 스테이지’(1986)를 지나자 갑자기 소가 밭을 가는 옛날 압구정동 사진과 지금의 강남 야경 사진이 함께 배치됐다. 전쟁 후 분단의 짧은 역사를 소개한 뒤엔 영화 세트처럼 복제된 1960~1970년대 서울 중심가 상점들의 간판이 놓였다. 그 안엔 PC방의 컴퓨터, 휴대폰, 럭키 비누, 금성 TV, 자동차 모형 등이 맥락 없이 진열됐다. 예상대로 오징어게임의 마네킹도 이유 없이 서 있었다. 단지 해외에서 이름이 알려진 탓일까. 작은 TV 화면에선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가 상영되고 그 옆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스틸컷이 붙었다. 물론 영화 기생충의 반지하방 화장실 세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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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이트는 지금의 K팝을 있게 한 한류의 팬덤을 소개하는 공간이었다. 아이돌그룹의 노래와 춤을 따라하는 공간이 등장하고 그 옆엔 1990년대 아이돌그룹 신화의 해외 팬들이 보낸 화환과 쌀이 어지럽게 배치됐다. 한국의 패션을 소개하는 공간에선 1900년대 채용신이 그린 ‘팔도미인도’와 한국 디자이너들의 현대식 한복과 기성복이 나란히 섰다. 시간의 배열도 맥락도 맞지 않는 전시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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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끈거리는 얼굴로 박물관을 빠져나오며 2015년 같은 장소에서 열린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1969~2010)의 전시가 문득 생각났다. 영국 패션계의 대표적 문제아로,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빠른 시간에 세계를 강타한 그를 재조명한 전시였다. 다소 기괴한 디자인으로 유명했던 맥퀸이 대학 시절 얼마나 많은 영국의 전통 의복을 연구하고 공부했는지 보여주는 스케치와 습작들이 가득했다. 그가 남긴 파격과 혁신은 결국 그가 수백 년에 걸친 영국 왕실과 귀족의 복장을 끝까지 파고들었던 집념이 토대가 됐다는 걸 관람객에게 자연스럽게 각인시킨 전시였다. 가장 현대적인 디자이너를 내세운 전시로 영국은 얼마나 뿌리 깊은 패션 디자인의 전통을 가진 나라인지를 깊고 넓게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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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류 전시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이 20억원이나 쓰였다. 그런데 한국인의 눈에도, 외국인의 눈에도 무엇을 마음에 남겨야 하는지 끝내 알기 어려웠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 전시는 애초에 V&A가 기획했다. 벨기에에서 태어난 한국계 여성 큐레이터가 총괄하고 주영한국문화원이 막판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한국인의 눈에도, 외국인의 눈에도 무엇을 봤는지 기억하기 어려운 저렴한 뷔페식 전시로 전락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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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우리가 아직 한류가 뭔지 모르는 탓은 아니었을까. 왜 이렇게 세계인이 열광하는 문화 강국이 됐는지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K팝을 이끌었던 SM과 JYP와 YG가 기획했다면 어땠을까. 애초에 문화라는 건 한 번에, 하나로 설명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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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다.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건 결코 한류가 아니다. 유럽의 길거리에서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한국 너무 좋아요”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한국에 한번 가고 싶다는 사람들도 넘쳐난다. 우리가 뭘 보여줘야 할지 이제는 스스로 질문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