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12월당
입력
수정
"러시아 개혁"호가 암초에 부딥쳐 파선의 위기에 놓여있다. 모스크바를엄습한 12월의 한파가 보리스 옐친대통령이 이끌어온 개혁바람을 통째로삼켜버린 꼴이 되었다. 옐친대통령은 금년 12월 한달동안 보수의 거점이된 의회(최고인민회의)와의 투쟁에서 만신창이가 된채 한해를 결산해야할것같다. 그의 개혁선을 이끌어온 선장(가이다르총리)은 보수풍랑에 휩쓸려갔고 선적한 화물(개혁아이디어)들은 하나 둘씩 실종되고있다.모스크바의 개혁진영은 19세기초 그들의 선배들이 마신 쓴잔을 또다시 맛보아야 하는건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근대화 무장혁명이 1825년12월 발발했다.러시아의 혹독한 전제정치를 타파하고 농노제를 폐기하자는 기치가 러시아 전국을 뒤흔들어 놓았다. 혁명의 모태는 신진청년장교단. 이들은 나폴레옹전쟁에 참전,농민출신의 사병들로부터 피폐한 농촌실상을 알게되었고,유럽전장에 참여하면서 엄청나게 낙후된 조국의 정치현실을 절감했다.전쟁이 끝난다음 귀국한 청년장교들은 비밀결사를 조직,입헌정체구현을 위한 전국운동에 착수했다. 1825년11월 황제 알렉산드르1세가 여행중에 급사하자 황제에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황위계승을 둘러싸고 분규가 있었다. 이 틈을 타서 혁명세력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12월14일 황제 니콜라이1세의 선서식장에서 새 황제의 선서를 거부하고 입헌정체 수립을 요구했다.혁명의 열기는 남부러시아에까지 쉽게 파급되었다. 그러나 막강한 정부군의 힘에의해 혁명군은 무참히 진압되었다. 579명의 지도자가 체포되었다.그중 5명의 혁명지도자는 교수형으로 처행되었고 121명은 시베리아 유형으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조국러시아의 근대화와 농노의 인간성회복을 위한 이들의 투쟁은 뒷날 데카브리스트(12월당원)혁명이라고 불렸다. 러시아어로 12월을 데카브리(dekabry)라고 부른데 연유한다. 신러시아창조를 위한 이들의 의지는 실패로 끝났으나 그 정신만은 오늘의러시아인민들의 핏줄속에 면면히 이어져 있으리라 믿어진다.근대 러시아의 혁명시인 푸슈킨은 데카브리스트 혁명을 아름다운 시로 노래했다.옐친의개혁정치가 신데카브리스트운동으로 발전,개선할날을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