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특강] APEC 개방적 지역주의..이재성 <대외경제정책연>

이재성 오는 15일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는 아태경제협력체(APEC) 18개 회원국정상및 지도자들이 참석하는 아.태지도자회의가 열리게 된다. 이번 회의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대목은 2000년대 APEC이 실현하고자 하는자유무역의 비전을 제시한 "보고르 선언"이 될 것이다. APEC 저명인사그룹(Eminent Persons Group)은 지도자회의 의장인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2020년까지 역내 상품 서비스 자본 투자의 전면적 자유화를 추진할 것을 권고하였는데, 과연 자유화에 대한 지도자들의 비전과 실천의지가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APEC 18개 회원국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대외지향적인 경제정책을 통해 성장을 달성해 왔다는 점이라고 할수 있다. 당연히 이들 나라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교역질서의 유지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을수 없었는바, 대내적으로는 무역및 투자활동의 촉진을 통하여 성장잠재력을 확충하고, 대외적으로는 유럽연합(EU)과 같은 폐쇄적인 지역주의 경향에 공동대처하기 위하여 APEC을 출범시켰다고 볼수 있다. APEC은 아.태지역 경제협력의 기본원리로 개방적 지역주의 (Open Regionalism)를 천명하여 왔다. 경제협력 또는 무역자유화의 이익을 역외국과도, 무차별적으로 공유한다는 의미의 개방적 지역주의는 EU또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같은 특혜적 무역블록과 구별되며 세계무역기구(WTO)의 최혜국대우원칙에 가장 근접하는지역주의라고 할수 있다. 또한 자유화 추진의 속도및 범위를 회원국간 협정에 따르기 보다는 각 회원국의 자발적 자유화 의지에 맡김으로써 경제발전단계등 아.태지역의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개방적 지역주의의 실천, 즉 APEC회원국들의 자발적 자유화를 통한 무역자유화의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유화를 추진하는 당사국이 자유화로부터 얻어지는 결실의 최대수혜자라는 공동인식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유화에 소극적인 나라들의 무임병차(Free Rider)를 배제할수 없으며 오히려 자발적 자유화 논리가 시장개방압력을 회피하려는 빌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결국 지금껏 APEC의 개방적 지역주의가 역내및 세계무역자유화의 진전에 기여한 정도는 극히 제한적이었다고 평가할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개방적 지역주의를 표방하는 APEC의 발전과정에서 드러난 가장 큰 문제점은의사결정의 비효율성을 들수 있을 것이다. 즉 역내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하여 합의제 의사결정방식을 채택한 현 APEC체제는 구속력 있는 협정이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보다는 회원국 정책당국자간 비공식 대화와 협의를 위한 포럼형식으로 운영되어 왔고 협력활동의 범위도 자료수집, 정보및 의사교환 정책협의등 비교적 쟁점이 없는 기능적 분야에 치중하여 왔으며 회원국간 상충하는 이해를 조정하고 수렴하기 위한 협상의 기능은 전적으로 배제하여 왔다. 그러나 세계총생산의 50%이상, 교역량의 40%이상을 차지하는 아.태지역의 대표적 경제협력기구인 APEC이 무역자유화를 포함한 역내외 주요경제현안에대하여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 것은 적절한 대응이라고 보기 어렵다. 예컨대 미.일간 무역분쟁, 미국의 일방적 무역제재조치 발동, 동아시아지역의 수출편향적 산업구조, 역내외 지역주의 움직임의 확산등 아.태지역의 성장과 발전에 장애가 되는 주요 요인들이 산적함에도 불구하고 대화와 협의 이외의 처방을 제시하지 못하는 APEC은 멀지않아 그 존재이유를 상실하게 될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보고르 지도자회의"는 APEC이 개방적 지역주의라는 기존의 한계에서탈피하여 2000년대 역내및 세계무역자유화를 선도할수 있을지의 여부를 판가름하게 되는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만약 지도자들이 EPG가 제안한 권고에 따라 자유무역실현이라는 공동의 비전에 합의하고, 자유화 프로그램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데 성공할 경우 APEC은 아.태지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WTO출범이후의 범세계적 자유무역질서를 선도해 나갈수 있을 것이다. 반면 APEC이 개방적 지역주의에 안주하여 구속력있는 경제협력기구로 발돋움하지 못한다면 아.태지역은 교역환경의 급속한 악화와 함께 NAFTA AFTA CER 등 군소지역으로의 분할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특히 APEC이 동아시아지역과의 만성적 무역불균형 시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경우 미국은 아.태경제협력의 중심축을 APEC에서 NAFTA로 이동시키는 동시에NAFTA 회원국을 선별적으로 확대해 나가게 될 것인바, 어느 무역블록에도 가담하지 못하게 되는 나라들의 성장다이내미즘은 크게 위축될 것으로 점쳐진다. 이와같은 비관적 시나리오가 현실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는 일방적 요구보다는 호혜적 양허를 주고 받음으로써 아.태지역의 결속을 강화해 나가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할것이다. 예컨대 선진국은 개도국의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기술이전 인프라개발 인적자원개발 등에 지원을 강화할수 있을 것이며 개도국 역시 무역자유화 협상에 동의함으로써 선진국과의 마찰을 해소함과 아울러 자국경제의 국제화를 도모할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싱가포르 홍콩 대만 호주 뉴질랜드등 중위권 국가들은 선진국.개도국간 이해를 조화시키는 조정자 역할을 담당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