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생명존중의 여성문화 창조..이우정 <국회의원>

이우정 1994년은 유난히 사건이 많았던 힘든 해였다. 하나하나 떠올리며 열거하기도 싫은 대형사고들,70년만에 처음이라는 살인적인 더위,가뭄으로 인한 식수난등 온갖 일들이 국민들을 괴롭혔다. 갑자기 터진 북한의 핵문제는 한때 한반도전체를 전쟁일보직전의 위기감이 도는 긴장된 분위기로 몰았다. 또 김일성의 사망으로 인한 조문파동,주사파발언에서 비롯된 공안정국조성등갖가지 일들이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몰아닥쳤다. 지난 한해를 돌아보면 이런 소용돌이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처럼 힘들었던 한해살이중에서 여성들을 특히 견디기 어렵게 만들었던 것은 위에 열거한 일과성 사건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사회에 깊고 넓게 뿌리박힌 인륜과 도덕의 파괴현상과 사회전체에 전염된 부패현상이었다. 끔찍한 살인사건과 부모형제까지 폭행하는 반인륜적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자녀를 보호하고 올바르게 길러야할 책임이 있는 어머니들의 고민은 태산같았으리라. 올바른 가치관,도덕이나 인륜등이 박물관의 골동품 정도로 취급되는 사회풍조속에서 모든 어머니들은 어떻게 자녀를 밝고 정직하고 명랑한 아이로 키워낼수 있을까 걱정하리라 생각한다. 도덕과 윤리가 파괴되는 현상과 사회불안의 일차적인 책임은 대부분 이 사회를 지배하는 남성중심문화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있는 "동성동본 금혼법"은 우리나라의 뿌리깊은 부계혈통 숭배사상의 좋은 예이다. "근친결혼 금지법"만 있으면 우생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손색이 없는데 몇백년전의 아버지(어머니는 상관이 없다)와 성이 같았다고 해서 결혼을 못하게 하는 이 부계혈통 숭배사상이 건재하는 한 평등과 민주 인간존중 사상은 이땅에 자리잡기 어렵다. 이러한 사상은 종국에는 계급차별을 낳고 인종 문화 종교등 갖가지 다른 차별을 유발하며 끝내는 약육강식의 무서운 문화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돈 권력 육체적인 힘을 많이 가진 자가 약자를 착취 약탈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를 보면 그러한 방향으로 진행되어 가는 듯하여 불안하다. 길거리에서 부녀자들이 납치돼 성폭행당한 끝에 살해당하거나 윤락가로 팔아 넘겨지고 어린 국민학생이 납치돼 돈을 뜯어내는 수단으로 이용되는등 약자가 설 자리가 없어져가는 현상이 이를 반증한다. 그러나 여성들도 사회의 일원인만큼 그 책임으로부터 면제될 수는 없다. 여성들도 그것을 방조 또는 보조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제는 여성들도 이 사회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여성을 보조적이고 의타적이며 순종적인 이등인간으로 만든 부계혈통내지 남성존중사상의 문화가 오늘의 결과를 가져왔다면 이제 우리는 그 원인을 캐고 평가하여 새 방향으로 역사를 돌려야한다. 여성 모두가 주인의식을 지니고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하는 판단이 서는 순간 우리사회의 존재양식은 바뀔 수 있다. 여성은 아직까지 사회의 피지배자요,피해자의 입장에 서있다. 이는 여성은 피지배자 혹은 약자의 아픔을 안다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이제야말로 생명존중의 여성문화가 창조되어야 할 때이다. 약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그들의 억울함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할 때 지금과는 다른 문화가 형성된다는 말이다. 여성들이 앞장서서 새 역사 창조의 기틀을 잡는 새해가 되었으면 하는 무지개같은 꿈을 꾸어본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