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동락] 김영수 <한전기공(주) 영광사업소 기술부장>

내가 난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허성보씨 덕분이었다. 지난 77년 제주화력발전소에 근무할때 같이 일했던 허성보씨는 당시만해도 불모의 상태였던 난 분재 수석의 전문가였다. 그의 집은 온통 분과 수석으로 가득했다. 나는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그의 집에 들렀고 취미에 몰두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넉넉함과 느긋함을 배웠다. 심신이 지쳐있던 어느날 "성격상 맞을 것 같으니 이 난을 한번 키워보라"며 그가 건네준 춘란 한 그루를 정성으로 키우면서 난과의 인연이시작되었다. 그로부터 계속 분이 늘어나 한때는 난 3백분과 분재 40분 정도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집안에서는 도저히 재배할수 없어 집 가까이에 난실(하우스)을 지어야 했다. 그때는 희귀종도 상당수 가꾸어 구경하려 오는 사람도 많았다. 우리나라 춘란이 복륜, 축입 등과 자생란인 흑란, 자란복륜, 새우단및 석부작(돌에 붙여 키우는 것)인 대엽풍란, 소엽풍란, 그리고 중국난으로 송매 노문단소 왕자 취일품 건란 옥화란 등 내가 가장 아끼는몇 분만은 지금까지 기르고 있다. 동양난은 서양난보다 기르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특히 물주기가 어렵기 때문인데 난은 물주기 3년이라고 한다. 글쎄 과연 그럴까? 난이 물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이 옥심을 버릴 수 있다면 꼭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은 정성을 쏟는 만큼 보람된 결과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해타산에 밝은 사람들을 싫어한다. 고가의 난을 자랑으로 아는 세태도 마땅치 않다. 난을 돈으로 따지는 사람들은 벌써 눈빛이 다르고 고약한 냄새가 난다. 이런 사람들은 난의 고귀함을 모르며 오염시킬 뿐이다. 영광사업소(원자력)로 옮겨온 지금 내겐 주위에 놓아두고 음미할수 있는 몇 분의 난밖에 없다. 난은 많아서 좋은게 아니고 늘 옆에 두고 대화할수 있는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해서 모두 정리했다. 그러나 내 주위엔 난과 대화를 나누는 새로운 친구들이 자꾸 늘어났고 93년 3월에는 그들의 뜻을 모아 "영광사업소 난우회"를 만들었다. 서순상 회장과 이형식 총무 등 13명의 회원들은 직장돌료들에게열심히 난을 나눠주며 교육도 병행하여 점차 회원이 늘고 있다. 올해 쯤에는 전시회도 개최할 생각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