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칼럼] 시원한 카타르시스 .. 김진애 <서울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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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가 안걸리는 사회란 없다. 문제는 스트레스가 아니라 스트레스를 푸는 방식이다. 카타르시스를 어떻게 갖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아직은 소비적,파괴적 카타르시스가 난무한다. 곤두곤두 술퍼먹기,포르노 탐닉,성판매는 대표적이다. 욕하기,폭력쓰기가 어린이들에게도 번진다. 데모나 집단민원도 파괴적 카타르시스 장치이다. 상실감을 적극적으로 풀 장치가 없으면 파괴적으로 발산된다. 특정개인에게는 범쥐나 폭력,때로는 살인까지도 카타르시스 장치란다. 수동적 카타르시스도 많다. "오빠부대"만들기,연예인에 대한 "팬클럽"만들기는 대표적이다. 학원과 문화센타 다니기도 수동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 아마 전문인들 사이에 열리는 각종 회의도 자신의 존재확인 수준이라는 점에서 아직 수동적이다. 도피적 카타르시스도 있다. 글써서 할 말했다하고 잊어버리는 성향의 언론이란 도피적이라 할만하다. 해외여행가서 안면몰수하고 저열한 행각에 빠지는 것도 도피성향의 발현이다. 좋은 사회경영이란 생산적,창조적,능동적,적극적인 카타르시스가 자연적으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전쟁이 없는 지금,그런가 하면 눈에 안보이는 치열한 전쟁에 모든 사람이 지쳐있는 지금,시원한 카타르시스는 그 어느때 보다 필요하니 말이다. "열린 참여"는 시원한 카타르시스의 원칙이리라,월드컵도 좋고 농구대회,야구리그를 보는 것도 좋다. 그러나 이왕이면 자기 동네 가꾸기,깨끗한 환경만들기,아이들의 워크셥,거리축제,도시축제,해외봉사,문화생산활동등등 얼마나 다양한 카타르시스를 가질수 있으랴.내손으로 뽑는 지방자치선거 역시 좋은 카타르시스 장치로 가꿀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사회,준비해서 즐겁고,하고 싶어 설레이고,참여해서 흐믓하고,뒷맛 개운한 한잔의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하여."위하여!"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