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이육사의 달

"내고장 칠원은 청포도 익어가는 시절 / 이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고 /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 하늘만 푸른 바다에 가슴을 열고 / 흰 돛단배가 곱게 실려서 오면 /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몸으로 /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태양의 달인 7월이 오면 시인이자 한일독립우동가였던 이육사(본명 원록 1904~1944)의 "청도포"라는 싯귀를 떠올리게 된다. 이 시에 드러난 실연의 비애에는 조국광복의 염원이 은연중 드러난다. 그가 남긴 시작품이 "청포도"를 비롯,34년에 지나지 않은데도 세상 사람들의 입에 널리 애송되어온 것은 민족의식에 투철한 그의 시정신때문이었다. 정부는 "청포도"의 달인 7월을 맞아 그를 "7월의 인물"로 선정하고 그의 문학세계와 애국정신을 재조명하는 갖가지 기념행사를 펼치게 되었다. 그의 생애를 되돌아 보게 되면 시인으로서 보다는 항일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경북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할아버지로부터한학을 공부한뒤 영천에 있는 백학학교와 보문의숙 교남학교에서 수학했다. 21세때인 1925년에 대구에서 의열단에 가입하면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게되었다. 27년에는 조선은행대구지점 폭파모의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항구소에 투옥되었다. 그때의 수감번호인 "264"의 음을 따와 이원사라는 팔명과 육사라는 호를 지었다한다. 그뒤 29년의 광주학생운동,30년의 대구격문사건에도 가담했는가하면 중국을 자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에 일심전력했다. 그의 온난활동은 조선일보대구지사에 근무하던 1930년 조선일보지상에 "말"이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시작품으로는 저항의식을 표출한 "절정", 실향의 비애를 읊은 "황혼"과 "청포도", 조국광복에의 의지를 담은 "광야"와 "꽃"등이 있다. 그밖에도 소설 수필 문학평론 일반평론을 남겨 놓았다. 1943년 중국으로부터 귀국하여 서울에 잠시 들린 그는 일본관헌에게 붙잡혀 북경으로 압송된뒤 북경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중 건강이 악화되어 석방되었으나 44년1월 이역의 하늘 아래서 40세의 삶을 마감했다. 1925년의 대구형무소 수감을 시작으로 17차례나 옥고를 치렀다는 기록으로볼때 감옥의 문턱을 넘나들지 않은 해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많은 편수는 아니지만 애국시를 남겨 지행일치의 본보기를 보여준 선각되자였음을 감지하게 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