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시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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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한때 채옹이라는 사람은 천성이 매우 인자하여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그는 어머니가 병을 앓는 3년동안 더워도 옷을 한번도 벗지 않고 잠도 거의 자지 않으면서 병석을 지켰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침식을 했다. 그의 효성은 어머니의 사후에도 변치 않았다. 그는 이른바 시묘를 했던 것이다. 시묘란 부모의 상을 당하여 묘를 쓴 다음 그 서쪽에 초막을 짓고 상주가 3년동안 기거하는 것이다. 시묘제도는 중국의 한 후한 진때에 널리 행해진 풍습이었던 것으로 정구 (조선조 중종~광해군)의 "오선생예설"과 이의조(정조)의 "가예증해"에 기록되어 있다. 그때만 하더라도 시묘는 죽은 부모에 대한 가장 효성스러운 행위로 생각되었다. 그뒤 송대에 유교적 예절의 규범을 확립한 주자는 시묘에 부정적이었다. 그의 "가예"에는 묘를 쓴 다음 축관이 신주와 혼백을 받들고 집에 돌아와 상청을 설치한 다음 그것을 상주가 지켜야 한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시묘가 시작된것은 고려말로 추정되고 있다. 유학자인 정몽주의 "포은집"에 시묘가 나쁜것이 아니라는 첫 기록이 나타난다. 주자의 가례를 신봉하던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시묘가 널리 행해지고 시묘제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세종때의 뛰어난 과학기술자였던 이순지는 어머니의 상중에 관직이 내려지자 시묘를 이유로 관직을 고사하는 상소까지 올렸다. 중종~선조 연간의 명신이었던 송인은 시묘를 "사사로운 것으로 진실로 하고자 하면 금할수 없다"고 했고 또 숙종~영조 연간의 학자였던 이재도 "첫째아들은 상청을 지키고 둘째아들은 시묘를 하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시묘는 죽은사람이 묻혀있는 곳에 그 혼이 머물러 있다고생각한데서 연유된 행위라 하겠다. 그러나 신주에는 죽은 사람의 혼이 담겨져 있다고 믿는 신주제도가 발달하면서 시묘의 의미는 상실되어 갔고 오늘날에는 그 의식을 지키는사람을 찾아 볼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 60대의 아들이 어머니 무덤 옆에 천막을 치고 3년 시묘에들어갔다고 한다.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할일없는 사람의 외고집 또는 고리타분한 낡은 풍습으로 생각될지 모르나 자식이 부모를 내다 버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패륜행위가 빈발하는 세태에 비춰볼 때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효행이아닐수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