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의 한국인] (25) 이순정 <홍콩 실 트레이딩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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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남쪽 끝에 붙어있는 작은 섬 홍콩. 100년전 중국이 아편전쟁 끝에 영국에 빼앗긴 이 섬은 중계무역을 통한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아시아의 네마리 용으로까지 불린다. 특히 "중국의 관문"이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각국의 비즈니스맨들이 몰려 드는데 "실 트레이딩"사 이순정사장도 그중 한사람. 지난 81년 한국 최고의 무역회사에 근무하던 그는 성실과 신용 그리고 건강만을 믿고 이곳에 뿌리를 내려 이젠 매출 1,000만달러를 훨씬 넘는 섬유무역회사를 이끌고 있다. 이사장의 어려서의 꿈은 대통령이나 판검사가 아니었다. "삼성의 이병철회장같은 최고의 기업가가 되겠다"는 것이 어려서부터의 꿈이었다. 이 꿈은 결국 머나먼 이역땅 홍콩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동안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던게 사실이다. 모든 스포츠에 남다른 취미와 소질이 있었던 그는 운동선수가 되고 싶기도 했다. 대학에 진학할 때는 훌륭한 교육자를 선망해서 사범대학(서울대)에 진학했다. 대학을 마치고는 큰 형님을 따라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진학, 공무원 생활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어려서부터의 그의 희망을 쫓아 비즈니스맨의 생활을 선택하게 된다. 70년대초 정부의 수출진흥시책에 부응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무역회사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었다. 그가 입사한 주식회사 대우는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직장이었다. 대우에서 8년간 실무와 비즈니스 감각을 익힌 그는 결국 나이 40이 다되어 이국땅 홍콩에서 기업가의 꿈을 펼친다. 대우 홍콩지사에 3년반 근무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가 실 트레이딩사를 설립한 초기에는 대우 홍콩지사 근무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산 섬유류를 수입해다가 홍콩을 비롯한 동남아 등 제3국으로 판매하는 업무를 주로 취급했다. 여기에는 우리 제품을 수입해다가 한국의 수출을 늘리는데 기여한다는 애국적 자부심도 한몫했다. 그러나 사업이란 것이 원래 뜻대로 되는 일보다는 그렇지 못한 일이 많은 법. 한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동남아 제품에 비해 점차 떨어지면서 사업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또 그가 아니더라도 한국산 섬유를 수입해다가 판매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비교적 순탄하게 자라온 그로서는 여러가지 난관 앞에서 견디기 힘든 깊은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이에 그는 사업방식의 전환을 모색했다. 한국산 섬유제품 수입 일변도에서 벗어나 홍콩이나 중국 대만 등지의 저가 의류원자재를 한국 의류업체들에게 공급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한국의 의류 수출업체들이 원단을 저렴한 값에 구입하지 못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착안한 것이다. 이 역시 한국의 주요 수출품목으로 떠올라 있는 의류의 수출단가를 낮추어 가격 경쟁력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한국제품의 직접 수입 판매에 못지 않은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이렇게 돌파구를 찾은 그의 비즈니스는 이후 수년간 별 큰 어려움 없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성장해 나갔다. 이사장은 현지 채용직원 6~7명과 함께 아침 9시부터 일정한 퇴근시간없이 저녁 늦은 시간까지 사업에 정열을 불살랐다. 그들은 고국으로부터 밀려드는 주문에 부응하기 위해 그야말로 혼연일체가 되어 열심히 일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거두어 87년에는 매출액이 1,000만달러에 달하게 됐다. 그리고 그해 이사장은 드디어 한국에 지사를 설립해 비즈니스를 더욱 확장시켜갔다. 그러나 사업전선에 항상 맑은 날만 있으란 법은 없었다. 해가 쨍쨍 나는 날이 있으면 구름이 끼고 비가오는 날도 있게 마련. 이때쯤 홍콩주재 한국 상사 주재원들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게 됐다. 또 이들이 임기를 마칠 때 쯤 본국에서 발령을 받으면 그대로 귀임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숫자가 자유무역항인 홍콩에서 자기 사업을 위해 주저앉았다. 물론 이들의 현지정착은 한국 전체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환영할 일. 그러나 이러한 후배들은 이사장에게는 무서운 경쟁자로 등장해 그는 이제까지보다 더욱 열심히 뛰어야 했다. 사업 이외의 어려움도 있었다. 그의 아내가 갑자기 간암선고를 받았던 것. 해외생활의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 늘 마음속에 모든 일을 터놓을 수 있고 상의할 수 있는 대화자요 조언자였던 그의 아내가 어느날 갑자기 간암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오직 앞만보고 뛰어왔던 이사장은 삶 자체가 뒤흔들리는 심정이었다.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아내의 병세는 차도를 보였고 이를 통해 그는 인생을 보다 폭넓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또한 신앙생활에도 더욱 정성을 다하는 계기가 됐다. 정치적인 사건도 사업에 영향을 미쳤다. 93년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이사장을 비롯한 많은 홍콩교포 실업인들의 역할과 중요성이 약화됐던 것. 과거에는 홍콩만을 통해서 이루어지던 비즈니스가 수교 후에는 홍콩을 거치지 않고 한국에서 중국과 직거래를 하는 경우가 늘어나게 된 것이다. 이 결과 전보다 몇배의 노력을 해야 전만큼의 과실을 얻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더욱 공격적인 경영으로 난관을 헤쳐나갔다. 중국 상하이시에 제2의 지사를 설치, 상하이 지사를 통해 원자재를 구입하고 서울 지사를 통해 이를 판매하며 홍콩 본사에서는 파이낸싱 업무를 처리하는 3각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현재 그는 급격한 환경의 변화 속에서 많은 애로사항도 갖고 있으나 그동안 꾸준히 쌓은 신용관게로 큰 어려움 없이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사업을 시작했던 초기 지출을 줄여보려고 한국 돈으로 600원 정도의 싸구려 도시락을 매일같이 먹었던 일, 하루종일 회사에서 늦게까지 일하고 섭씨 30도가 넘는 홍콩의 무더운 날씨에도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서 50원짜리 2층버스를 타고 다시 산중턱에 있는 집에까지 걸어다니던 일 등은 오직 의욕과 성실 그리고 젊음 하나로 자신을 단련시켰던 것으로 지금은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는 앞으로 섬유 이외에 비섬유 부문으로 사업을 확대해 나갈 계획을 갖고 있다. 현재 홍콩 본사에 7명의 직원이 함께 일하고 있는데 직장 옮기기를 밥먹듯이 하는 홍콩에서는 드물게 5년이상 함께 보조를 맞춰 온 베테랑들이다. 아울러 그는 15년간 축적한 신용으로 거의 모든 결제를 신용장이 아닌 그의 개인 수표로 거래하고 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즉 그는 물품 구입시에도 30일 외상조건부 거래가 허용될 정도로 거래처에서는 믿어주는 사람이 되었으며 이는 그에게 금융조달 비용을 많이 절감시켜 주고 있다. 비즈니스를 떠나서도 이사장은 2000여 홍콩 한인사회에서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그는 10여년간 홍콩한인회 이사 한인상공회 사무총장 한인천주교 신도회장을 역임했고 92년에는 한국 정부로부터 산업포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그는 홍콩 한국학원 학원장 홍콩한인상공회의소 이사 평화통일자문위원으로 참여하면서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홍콩에 사는 한 교민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한국과 한국인을 대표하고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매사를 처리해 나가고 있다"는 이사장. 그는 홍콩에 한국인의 긍지를 심어가는 우리의 자랑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