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개방화시대의 장벽..홍성웅 <한국건설산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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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외국에서 안락사할 수 있는 방법을 자세히 소개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최근에 안락사의 법적 허용이 미국의 의학계 종교계 법조계에서 새삼스럽게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요즈음 화제가 되고 있는 소설 "아버지"에서도 인간 존엄성이 상실된 생명을 단순 연장하는데 대해 주인공이 갖는 회의가 또한 많은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갖게 한다. 생로병사는 자연계뿐만 아니라 경제현상에서도 발견된다. 기업들 역시 생로병사의 라이프 사이클을 밟는 것이다. 건전한 경제풍토에서 기업의 진입과 퇴출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유망산업 분야에 새로운 기업들이 태어나고 사양산업에서는 업종변경이 이루어진다. 가격경쟁력을 상실한 우리 산업이 동남아를 비롯한 해외시장으로 진출하는 대신에 고부가가치의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대체된다면 바람직한 방향으로 산업구조 조정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정부는 금융과 제반 행정조치를 통해 기업에 대한 국가통제를 강력히 시행해 왔다. 개발초기에 이것이 나름대로 효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나 경제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진 현상황에서 이런 유형의 정부개입은 축소돼야 한다. 아직도 부실 대기업의 회생을 위해 여신확대 등 무리한 지원을 계속하는 것은 기업의 자연스러운 퇴출을 막아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퇴출해야 할 대기업을 지원하는 것은 우수한 중소기업을 육성할 자금을 고갈시키고 높은 금리를 일반고객에게 부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는 규제완화 차원에서 이러한 장애요소를 제거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시장개방도 이러한 맥락에서 추진된 것이라고 본다. 건설업도 그동안 시장과 면허의 개방으로 늘어난 업체들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경영의 합리화와 시장개척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 경제에는 산업구조개선과 기업경쟁력을 가로막는 제도적 요인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전문화를 통해 건설업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부도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업무영역간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설계와 시공의 분리는 부실시공 등의 원인을 제공하고 전업의 기회를 제한해 건설업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설계와 시공업영역간의 진입장벽 제거는 생산과정상에서 상호 기술의존도가 높은 부문끼리 수직적 통합을 이뤄 전체 공정의 효율을 향상시킬 수 있다. 또한 업무영역의 확대는 세부 분야별 전문화를 촉진, 산업전반의 경쟁력을 높이고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분업화를 유도함으로써 대.중소기업간 보완성을 향상시킬것이다. 선진국의 경우 설계와 시공의 통합은 시장기구 내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졌으며 그러한 토양 위에서 벡텔, 시미즈와 같은 기업이 탄생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건설업체간의 조화로운 공존이 이뤄지고 있다. 한편 현재 건설업의 면허체계는 일반과 전문면허의 중복보유를 금지하고 있다. 이것은 중소 전문건설업체를 보호한다는 명분에서 출발했으나 전문업체의 대형화 추세와 아울러 건설공사의 내용이 점차 다양화 복잡화되고 있어 양자간의 진입규제는 그 의미를 상실했다고 판단된다. 개방화된 국제경제 질서하에서는 국내 기업간 또는 업무영역간의 이해조정이라는 시각이 아니라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우위 확보라는 대승적 입장에서 문제를 보아야 한다. 기업의 퇴출에는 불가피하게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경영자와 근로자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기업및 금융기관 등에 예상밖의 큰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퇴출의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건설업은 기업 상호간의 연대보증이 널리 행해지며 프로젝트에 다수의 기업들이 하도급형태로 참여하기 때문에 한 기업의 도산이 연쇄도산으로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정부는 급격한 환경변화로 기업이 연쇄도산하는 것을 막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한 정책의 수순은 단순히 개방에 대비해 진입장벽만을 제거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수 기업을 변별할 수 있는 보증, 보험 등의 금융관행을 개선해 기술력이 있는 우량기업이 도산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특히 업체의 재정능력은 물론이고 기술력과 공사실적 등을 면밀히 검토해 공사참여의 여부가 평가되는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지금 우리 경제에 대한 국내외의 전망이 어둡다. 이것이 처음 겪는 어려움은 아니더라도 여러가지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이번의 난국은 쉽게 극복되기 어려우리라는 전망이다. 그러나 건설산업은 어려울 때마다 한국경제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70년대의 오일쇼크때 외화획득으로 유가충격을 흡수함은 물론 국제수지를 개선하고 중화학공업 육성에 재원을 조달했으며 막대한 고용을 창출해 왔다. 21세기 서비스와 정보산업이 주도하는 경제구조에서도 건설산업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현재의 어려움속에서 건설산업에 거는 기대가 더욱 새롭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