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구의 중소기업 이야기] (8) '로빈 훗'

영국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2시간 정도 가면 노팅검이란 작은 도시가 나타난다. 이곳 중앙역에 내려 고색창연한 석조건물들을 지나 서쪽으로30분쯤 걸어가보자. 이번엔 넓은 숲이 보인다. 대단히 큰숲은 아니지만 이 셔우드를 아는 사람은 예상외로 많다. 바로 로빈 훗이 활약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 숲을 돌아 10분정도 내려오면 작은 산업단지안에 "수산라이트"란 한글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는 결코 한국계 기업은 아니다. 이 회사의주요아이템은 바위층을 뚫는 롱붐. 스튜어트라이트씨(37)가 사장이다. 이 업체 사장을 처음 만나면 누구든 "어,당신은 꼭 로빈훗 같군요"라고얘기한다. 180cm의 훤출한 키에 움푹패인 눈매가 영락없이 영화속의 로빈훗을 닮았다. 지난해 4월의 일이다. 라이트사장은 저녁 9시 인근도시인 셔필드의 축대공사현장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암반 붕괴사고로 바위를 뚫는 브레이카의 로드가 다 마모됐다며 부품 2개를 급히 보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늦어지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며 발을 동동굴렀다. 라이트사장은 몹시당황했다. 현장에서 요구하는 부품은 한국에서 오는 것이어서다. 그는 항상 기업의 생명은 애프터서비스에 달려있다는 걸 실천해왔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루안에 애프터서비스가 가능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날 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한국부품을 어떻게 하루만에 영국의 노팅검까지 배달시켜 셔필드에서 교체해준단 말인가. 그는 한국의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급박한 사정을 얘기했다. 한국시간으로 새벽5시에 전화를 받은 한국측 수출과장은 잠이 덜깬 상태였지만 그길로 공장에 달려가 파쇄용로드를 트럭에 싣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그사이 라이트사장은 사고현장에 달려가 상황을 살펴봤다. 파쇄장비가 암반사이에 놓여 이미 다른 건설장비를 새로 투입하긴 어려운 상태였다. 현장에서 인부들과 함께 밤을 꼬박 새우며 안전지지대를 설치했다. 이어 그는 런던으로달려갔다. 부품이 도착하자 다시 현장으로 뛰었다. 결국 20시간만에 부품을 교체해줬다. 아슬아슬하게 큰사고를 막아낸 것이다. 이때 한국측의 신속한 부품공급에 감동을 받은 라이트사장은 자기회사의 이름을 라이트브러더스에서 수산라이트로 바꾸었다. 한국측 부품공급업체인 수산의의리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기업이란 남들이 잠든 밤에도 수요자를 지켜주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업인은 소방관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그는 남을 돕는 일이라면 밤잠자지 않는다. 회사수익의 대부분을 지역사회에 기부하는 라이트사장. 그야말로 활대신 공구가방을 든 현대판 로빈훗이다. 그의 먼지묻은 승용차가 노팅검의 거리를 지나가면 참 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든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