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문 트인 정태수씨 법정 항변 '눈살' .. 한보사건 2차공판

지난 4월 이후 실어증 증세를 보여 침묵으로만 일관했던 한보그룹총회장 정태수씨가 18일 한보사건 항소심 2차공판에서 4개월만에 말문을 열었다. 정씨는 막혔던 말문이 트이자 마자 실어증을 앓았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또렷하고 강한 어조로 검사와 설전을 벌이는가 하면 신문까지 도중에 가로막아 가며 공소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하고 나섰다. "모르쇠" 전략으로 일관하던 한보청문회나 1심 공판 당시와는 사뭇 다르게 장황하지만 강도높은 설명을 곁들여 가며 적극적인 자기 변론에 나선 것. 변호인 보충신문에서 차분하게 대답을 이어가던 정씨는 검찰측 신문이 진행되자 되레 역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제2금융권 인정이자 액수를 놓고 한바탕 설전을 벌인 정씨는 "검사님은 사업에 대해 모른다. 명동 사채시장에 한번 가보라"고 훈계. 횡령죄 공소사실에 대해서는 "등촌동 가양동 땅 죄다 팔아 회사 돈 갚는데 쓰고 숟가락 하나까지 회사에 집어넣었는데 어째서 횡령이냐"며 다그쳐 반문. 검사 신문을 가로막고 묻지도 않은 말에 설명까지 늘어놓던 정씨를 보다못한 재판부가 "사족은 달지 말고 묻는 말에만 답하라"며 주의를 주기까지 했다. 재판시작과 함께 교도관에 업혀 들어온 피고인이 대법정이 쩡쩡 울릴 정도의 카랑카랑한 진술을 이어가자 방청석 여기저기에서 수근거림이 일었다. 대여금 계정 변칙처리 등을 실무자 탓으로 돌리는 정씨에게 검사가 "머슴"이 어떻게 알아서 하느냐며 쏘아붙이자 "청문회장도 아닌데 머슴 얘기는 왜 하느냐. 여기는 엄연히 법정"이라며 너스레를 떨어대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옥중재기를 꿈꾸고 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나돌고 있는 가운데 법정에 선 정씨에게서 더이상 당뇨병에 우측마비 증세까지 온 70대 노인의 병색을 찾을 수는 없었다. "로비의 귀재"로 정재계를 누비던 정씨가 기력을 되찾은 이날 모습은 엄청난 파문을 몰고온 한보사건의 고개숙인 주범이 아니라 아직도 "철강왕국"의 꿈을 버리지못한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