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열전] (37) 취금헌 박팽년 <7>

세종은 이 해 6월에 안평대군에게 "비해당"이라는 당호를 내려주는데 안평대군은 박팽년에게 부탁하여 그 전말을 밝히는 기문을 짓게 하니 "박선생유고"에 수록된 "비해당기"가 그것이다. 경사의 지식이 총동원된 명문장이다. 이를 옮겨보겠다. "예전의 군자는 그 거처를 반드시 넓은데 두고 그 저택을 반드시 편안한데 두었으니 높고 밝고 넓고 기름진 땅에 거처하기를 기대해서이다. 그 편안함이라 하는 것은 만고의 세월을 지내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요, 그 넓음이라는 것은 천하를 다 해도 남김이 없는 것이니 진실로 위에 마룻대가 있고 아래에 서까래가 있는 제도(집의 형태)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래서 반드시 거실에 살면서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였으니 주회암(주자,1130~1200)의 경재나 진서산(진덕수, 1178~1235)의 사성재가 이것이다. 정통 임술(세종 24년,1442) 6월 어느날 안평대군이 대궐에 입시하니 상감께서 조용히 물으시기를 "아무의 당명은 무엇이라 하느냐" 안평이 없음으로 대답하자 상감께서 증민의 시를 외우시고 또 "서명"에 미쳐서 이르시기를 "비해로 현판을 다는 것이 마땅하겠다"하신다. 안평이 머리를 조아려 받들고 나서 기쁘고 놀라워 드디어 궁중에 있던 여러 선비들에게 말을 구하여 그 뜻을 펼치니 이는 대개 상감께서 내려주어 권면하신 것을 자랑하고자 해서이다. 나는 가만히 듣고 찬탄해서 말하였다. "크구나. 임금의 말씀이여! 그 우리나라 자손에게 영원히 전해질 모훈이로다" 일찍이 "주역" 권 1건의 상을 보니 이르기를 "하늘의 운행이 굳세니 군자가이로써 스스로 강하여 쉬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저 하늘은 낮밤을 서로 번갈아 잇대고 계절을 갈마들여 나아가니 움직이면 번개와 벼락 바람 비가 되고 형상을 지으면 곤충 초목이 되어 지극하게 되지 않는 것이 없으나 한번도 쉬거나 멈추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오직 그 정성일 뿐이다. 사람은 곧 그렇지 않아 반복할 수 없으니 상성의 자질이 아니면 짓고 꿰매는 어려움이 없을 수 없어 안회의 현명으로도 석달을 어기지 않았을 뿐이거늘 하물며 그 아랫사람이겠는가. 시험하여 곧 거처를 가지고 그것을 비유한다면 성인의 도는 문 섬돌 마루 방과 같아 등급이 분명하니 진실로 건너뛰어 나아갈 수도 없고 또한 획을 그어 그칠 수도 없다. 만약 지성으로 쉬지 않는 공이 없다면 그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것이 길보(원 김이상,1232~1303)가 처음으로 비해의 송을 발표한 까닭인데 횡거(송장재,1020~77)는 또 존양(본심을 보존하기 위해 착한 본성을 양성하는 것)의 설로 그를 보태니 그 말은 더욱 절실하였다. 이는 진실로 성문(유가)의 지극한 공력이며 도를 배우는 이들의 가장 큰 방법이다. 이제 안평은 타고난 바탕이 탁월하여 배우기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기는 마음이 지성에서 나와 잠깐동안이라도 반드시 선비답고자 하니 그 부지런함은지극하다 하겠다. 성상께서 특히 이로써 명하심은 오직 그것을 권면하신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신 까닭이니 더욱 아침 저녁으로 이에 종사하여 성상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그 운행은 더욱 하늘과 같이 굳세지고 그 거처는 더욱 천하와 같이 넓어져서 이 당(비해당)은 곧 국가와 더불어 끝없이 편안함을 함께 하리라. 성상의 명이 어찌 후세에 영원히 빛나지 않겠는가. 내가 문장이 졸렬하여 성대한 아름다움을 이끌어 성상의 뜻을 펼쳐내지 못하고 다만 이름지어준 세월만 기록할 뿐이다" 이 해 박팽년의 고향인 전의에서는 지난해 겨울에 부임해온 현감 하길지가 동헌 뒤편에 정자를 늘려 짓고 망운정이라 이름지은 다음 안평대군에게 그 현판을 써달라고 하여 걸고 박팽년에게는 그 기문을 부탁하니 박팽년은 "망운정기"를 지어 보낸다. 안평대군에게 현판 글씨를 부탁한 것도 박팽년이었을 것이다. 박팽년의 "망운정기"는 다행히 살아남아 "박선생유고"에 실려 있는데 망운정이 건립되는 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구름을 바라보는 정자"라는 의미의 망운, 즉 구름을 바라본다는 의미가 두가지가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하나는 객지에 나온 자식이 부모 계신 곳을 그리워하며 그 곳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바라본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비를 기다리며 구름을 바라본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런 두가지 큰 의미를 지닌 정자이름을 지은 하길지의 현명함을 기리는 것으로 이 문장을 마무리짓고 있다. 세종 25년(1443) 계해는 박팽년이 27세 되는 해인데 이 해 중춘, 즉 2월에 박팽년은 성삼문 이개와 함께 양주 회암사를 찾는다. 주지 천봉 만우(1357~1446)에게 시학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이때 만우는 86세의 고령이었으나 목은 이색(1328~96)과 도은 이숭인(1349~92)으로부터 시학을 전수받아 시명을 떨치고 있었으므로 이에게서 시학을 전수받으라는 왕명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이들 세사람은 4월까지 머물며 시학을 배우고 4월27일에 만우를 서울 흥천사 주지로 이임 발령케하여 만우대사를 모시고 함께 상경하는 듯하다. "세종실록" 권 100, 25년 계해 4월27일 임자조에 이런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회암사 주지 승 만우에게 명하여 흥천사로 이주하게 하고, 이어 의복을 내리고 예빈시로 하여금 3품의 녹미를 지급하게 하다. 만우는 이색 이숭인을 직접 뵙고 시론을 들을 수 있어서 시학을 조금 알므로 이제 두보 시를 주해하는데 질의하고자 해서이다" 두보시를 주석하기 위해 세종은 박팽년 성삼문 이개로 하여금 만우에게서 시학을 정식으로 배우게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박팽년이 회암사에 석달간 머물며 시학을 배우는 사이에 그곳 승려들의 요청으로 몇 편의 서문과 기문을 지어주게 되는데 이것들은 승가에 전승되면서 인멸되지 않아 "박선생유고"에 수록될 수 있었다. 우선 운곡이라는 승려가 묘향산으로 떠나는 것을 기리는 글인 "운곡이 묘향산으로 가는 것을 보내는 머리글"이 그것인데 여기서는 박팽년이 천보산 회암사 황설각이란 집에서 거처하며 독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월암이란 승려가 구름처럼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러 나가는 것을 보내는 것을 기념하는 글인 "월암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러 가는 것을 보내는 머리글"인데 여기서는 박팽년이 성삼문 이개와 함께 황설각에서 같이 지내며 공부했던 사실과 성삼문이 장난기가 심하여 지나가는 월암을 불러세워범패를 부르게 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들과 월암이 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또 "설경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러 가는 것을 보내는 머리글"에서는 만우의별호가 오매노인인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다음은 만우의 시자인 임향헌 종계를 위해 써준 "임향헌기"가 있고 역시 만우의 제자로 범패를 잘 하던 죽암을 위해 써준 "죽암기"가 있으며 만우의 상수 제자인 화헌 휘 상인을 위해 써준 "화헌기"가 있는데, "임향헌기"에서 박팽년과 만우의 인연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으므로 이를 옮겨보겠다. "천봉은 선림의 표상이다. 예전에 흥천사에 주석함에 내가 자주 방문했었는데 동자 하나가 항상 좌우에 있었다. 얼굴이 그림같이 아름다워 내가 몹시 사랑했었지만 뒤에 천봉이 다른 절로 옮겨가자 내가 하루도 부드러운 말로 접대할 날이 없었으니 하물며 동자라는 사람을 볼 수가 있었겠는가. 금년 봄에 틈을 내주는 은혜를 입어 천보산에 들어오니 이때 천봉의 나이 80이 넘었으나 귀와 눈이 아직 총명하였다. 나의 기쁨과 다행함이 어떠했겠는가. 천봉도 역시 내가 온 것을 기뻐하여 나를 방장에 앉히고 나에게 차를 마시게 하는데 한 납자(승려)를 불러 앞에서 시중들게 한다. 차를 끝내고 맞이하여 황설각으로 가는데 종계라는 이가 나를 따라와 앉는다. 내가 자세히 살펴보니 흡사 구면인 듯하다. 그가 손을 잡으며 조용히 말하기를 "열네살에 일찍이 그대를 흥천사에서 보았는데 그대는 나를 잊었는가" 나는 부끄러워하며 감탄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대사는 어느 해에 머리를 깎았소. 예전의 동자가 지금 어찌 이렇게 커서 하늘을 찌르는 소나무가 되어 있더란말이오. 여러해 자라서 형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니 내가 못 알아보는 것이 괴이할 것이 없소" 대사가 인해서 청하기를 "우리 스님이 이미 내 집을 이름지어 임향이라 하셨기에 그대가 그것에 기문을 지어주기를 기다린지가 오래이다. 아낌이 없으면 다행이겠다"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은 높은데 있고 땅은 아래에 있으며 만물은 흩어져 서로 다른데 사람도 그 사이에서 수풀처럼 빽빽이 모여 있으니 초목과 다른 것이 무엇이겠는가. 오직 마음일 뿐인데 다만 사람은 그 마음을 욕심으로 가득 채워서 갈대와 억새가 그 땅을 가득 채우듯 한다. 비록 지초와 난초의 향기가 있다 하더라도 가시나무가 그것을 해친다면 그 보통 초목과 더불어 썩지 않는 것을 얼마나 바랄 수 있겠는가. 이제 대사는 천봉의 아래에 땅을 얻어서 오래 천봉의 비로 길러졌으니 보통 초목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대사여! 대사여! 전단 향나무로 그 숲을 이루고 치자꽃으로 그 향을 이루시오. 나는 진실로 크게 수립한 바가 있기를 기대한다오. 그러나 사람이 성 색 향 미 촉 법에 다치는 것은 초목이 서리와 눈에 다치는 것에 비교할 바가 아니라오. 경계해서 훼손하지 말고 열반의 세계에 그것을 세우도록 하시오. 다만 나는 우리 대사가 말뚝이 되어 오늘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우리 대사를 알아보지 못하게 될까 미리 걱정할 뿐이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