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빗나간 애국심

IMF체제후 한 신도시 초등학교에선 학생들의 가방을 뒤져 외제학용품이 나오면 혼쭐을 낸다고 한다. 그래서 해외에서 막 돌아온 학생들까지 멀쩡한 외제를 버리고 국산으로 교체하느라 법썩이다. 이탈리아제 의류와 프랑스제 향수를 수입하는 강남의 한 수입상은 거래은행의 기피현상에다 일부 맹렬(?)소비자 보호단체들이 회사 문앞에서 번갈아 가면서 벌이는 피케팅에 시달린 나머지 휴업계를 내기까지 했다. 자동차 수입상들의 경우는 공영TV에서조차 외제차 타는 연예인까지 조져대는 바람에 사실상 영업포기 상태다. 학교 은행방송 다 나섰는데 세관도 애국의 대열에 뒤질리 없다. 최근 모 대기업의 구조조정 자문을 하러 입국한 영국 브리스톨 대학의 라린다 교수는 김포공항에서 1시간가까이 시달렸다. 인도계인 그는"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세관원이 얼굴색만 보고 불법취업하러 들어오는 동남아 근로자로 취급했다"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어디 외국인에게 뿐인가. 한 택시기사는 IMF한파에 밀려 연변으로 돌아가는 조선족 동포에게"정리해고시대다. 우리도 어려운데 다시는 오지말라"고 면박준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했다고 한다. 물론 6.25이후 최악의 국난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명색이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회원국이다. 설사 가입 자체가 실수였다 하더라도 일단 국제사회에서 성인식을 치룬 이상 경제가 다시 개도국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처신마저 그런다면 곤란하다. 더욱이 외국인들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체점하는 IMF체제에서 "체면불구, 안면몰수식" 애국심 발휘는 역효과를 내게 마련이다. 당장 반짝 이득을 볼지는 모르지만 통상마찰과 시장조기개방을 자초하는 등 결과적으로 "소탐대실"하게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것 같다. 이동우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