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교수 특별기고] (4) '기업 개혁' .. 내실 다져야

60년대에 경제개발을 이끌었던 당시의 장기영 부총리는 "부채도 자산이다"그리고 "한사람에게 몰아줘야 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가진 것이 없으니 사업은 빚으로 할수 밖에 없고 밑천이 적으니 빚으로 마련한 자금을 대기업에 몰아주어 앞장서게 할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그동안 우리나라의 대기업 특히 재벌기업들은 경제발전에 있어서 기관차 역할을 해왔다. 금리는 높고 생산성도 낮았지만 저임금과 산업보호 그리고 정부지원의 힘으로 급속하게 몸집을 불릴수 있었다. 부채가 쌓이면 이를 인플레가 대신 갚아 주었고 재무구조가 나쁘더라도 돈을 빌려주는 은행들이 이것을 따지지 않았으며, 그러다가 간혹 기업이 넘어지면 정부가 구해 줬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런 세상이 아니다. 경제는 개방시대를 맞이 하였고 노임과 물류비도 엄청 뛰어올라 거의 모든기업이 경쟁력을 잃어 버렸다. 기업의 경쟁력은 노동 자본 토지와 같은 생산요소의 가격(즉 생산비)과 생산요소들의 생산성이라는 두가지 요인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생산비 경쟁력에서 이길 가능성은 없다. 노임이나 금리 또는 땅값을 내리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이것으로 다른나라와 승 를 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생산성경쟁에서 이기는 길 밖에 없는데 그렇게 하자면 현재의 기업구조는 환골탈태하는 변혁을 겪어야 할 것이다. 첫째로 기업가정신을 고쳐야 한다. 대기업의 경우에도 경영의 기본틀은 가족삼점경영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업하는 목적이 자손들에게 대대로 재산을 물려주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있다. 그래서 소유와 경영이 세습되고 있으며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소유주는 의사결정을 독점전횡하고 있으며,그러면서도 경영책임은 지지 않고 있다. 소유권의 세습을 위해서는 변칙적인 상속과 증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족벌기업 주의는 농경문화 씨족문화 집단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서 자본주의를 천민화시키는 요인이다. 이러한 기업정신의 후진성을 시정하는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다음으로 부채경영에서 내실경영으로의 전환을 이룩해야 한다. 그동안 기업들은 은행빚을 얻어서 부동산만 사 놓아도 돈을 버었으며 법인세를 절세하기 위해서 내돈은 빼내고 그대신 빚을 넣어 사업을 하는 일이 많았다. 이러다 보니 우리기업들은 빚더미위에 앉아 있고 총매출에 대한 이자부담율이 6%(올해는 10%로 추정됨)에 이르고 있으니 이 비율이 1~2%에 불과한 경쟁국들과 어떻게 경쟁할수 있는가. 우리나라금리가 높다고 불평하지만 고금리의 근본원인은 기업의 과다차입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재무구조개선을 위한 과감한 개혁이 추진돼야 한다. 셋째로 선단식 문어발경영에서 벗어나야 한다. 피터.드러커교수는 선단식 다각화경영방식을 초기산업시대의 유물이라고 했다. 오늘과 같은 세계무한경쟁시대에는 여름에 쓰는 우산도 만들고 겨울에 쓸 털모자도 만드는 저천후 생존전략으로는 그 어느것도 세계일류가 될수 없다. 다각화경영을 위하여 흑자기업이 적자기업들을 끌어안고 가야 하는 시대는지났다. 이제는 모든 계열기업,모든 부서, 모든 직원이 경쟁력을 가져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도태돼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선단식 다각화경영체제는 기업을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 과감히 청산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정부는 기업의 구조조정을 도와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토지신탁채권(채권)에 의한 기업부동산매입제의 실시를 권고하는 바이다.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위하여 부동산을 팔고 싶어도 팔수가 없는 상황이다. 정부는 성업공사나 토지개발공사에 있는 토지신탁회사로 하여금 토지신탁채권을 발행토록 하며 이 채권을 주고 기업부동산을 매입하고 그 대신 이 채권은 은행부채상환에만 쓰이도록 은행부채와 상계하면 현금없이도 기업부동산의 유동화가 가능할 것이다. 끝으로 모든 거래와 경영을 투명하게 하여 기업이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기업의 불공정한 내부거래와 비자금, 기업회계에 대한 불신, 경영책임소재등 이러한 문제들이 분명하게 정리돼야 한다. 이런 점에서 결합재무제표의 작성과 외부감사제도의 도입 등 경영투명성을 위한 개혁이 차질없이 추진돼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