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출판위기와 지식산업 붕괴 .. 박덕규 <소설가>

박덕규 국내 최대 서적도매상 보문당이 최종 부도처리됐다는 소식을 듣던 날,나는 이번에 임용된 대학으로 첫 출근을 하고 있었다. 나는 20년 가까이 문필가로, 출판기획자로, 책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데서 생기는 이익을 챙겨 살아온 작가다. 내 책을 출간해주던 출판사는 이미 지난 연말 부도를 내고 조금씩 뒷수습을해오던 중이었는데 이번 사태 때문에 완전히 소생불능이 돼버리는게 아닌가. 내게 집필실을 제공해주던 출판사는 아직까지 지난달 직원 급여를 못주고 있다는데 어떻게 되나, 내가 기획한 책이 잘 팔린다고 좋아하던 출판사 사장은 어느 정도의 피해를 볼까, 몇달새 출판사에서 해고된 후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기웃거리던 내 후배들은 어떤 표정일까. 아니 그런 것들도 다 남의 일이라고 마음을 누그러뜨려 보지만 갑갑한 가슴은 진정되지 않는다. 이제 내 책은 어디서 출간할수 있겠나. 상반기에 소설을 출간키로 예정돼있던 출판사로부터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 문예지 지면이 줄어들고 있다는데 이제는 어디다 발표하지, 책 출간은 커녕 발표도 기대하지 못하는 글을 과연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쓸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이런 사태는 예정된 것이지 않은가. 소매서점이나 출판사는 망해도 도매상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속설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벌써 5년 전이었다. 소매서점에서 현금을 받아 출판사에는 어음으로 결제하고, 때론 어음할인까지 맡아주면서 2중3중으로 이익을 챙기던 도매상이었다. 이런 도매상 수가 늘어나자 서로 마진을 포기하면서까지 소매서점 확보경쟁에 돌입함으로써 도매업계는 위기를 자초했다. 투명한 도서유통기구를 설립하려는 일부 서적상과 출판사들도 있긴 했지만 이미 얽히고 설킨 도서유통 관행을 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에 사회전반의 불황과 도서대여점 난립 등으로 갈수록 매출이 줄어들수밖에 없었고 그 영향이 출판사와 작가들에게 직접 불어닥치고 있었다. 이런 유통구조에서 살아남으려고 했던 출판사의 생존전략은 또 어떤 것이었나. 베스트셀러가 없으면 도매상에서 대접을 해주지 않으니까 대부분의 출판사들은 베스트셀러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출판사들은 "최고의 순수문학"이라느니, "문학상 수상작"이라느니,"여성해방"이라느니 하는 수식어를 내세워 대형 광고를 남발하고 독자와 서점측의 관심을 끄는 데 매진했다. 많은 출판사가 한두번의 실패로 문을 닫는다는 것을 알고도 이런 수법을 마구 동원하는 이유는 "한탕주의"로 한건 올리지 않으면 많은 종의 책을 출간하고 유통시키는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문학성은 어느새 상품성의 다른 이름이 되고 진지함은 통속성의 다른 이름이 되면서 책을 중심으로 고양되고 향유돼야 할 지식문화는 간 곳을모르게 되었다. 바람직한 책문화가 실종될수밖에 없는 현실을 눈앞에 두고 제 무덤을 파고 있었던 것이 우리의 도매상이고 출판사며 저술인이었다. 베스트셀러 문화에 편승한 것이 언론이었고, 진정으로 좋은 책을 만들어 보급하는 일을 마땅히 장려해야 할 정부는 팔짱만 끼고 있었다. 대형 도매상이 부도를 내면 출판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작가나 지업사 인쇄소 제본소 편집대행사들이 줄줄이 타격을 입게 된다. 그 무수한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좋은 책을 읽고 자라 교수가 되고 언론인이 되고 공무원이 된 사람들은 그들 자녀에게 어떤 좋은 책을 구해 읽힐 것인가. 부도는 보문당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고 이 비극의 끝에는 한국 지식산업의 황무지화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혼이 빠진 것과 같아진다. 이건 쌀과 물이 떨어지는 현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정부에 긴급수혈을 요청하는 출판인들의 외침을 귀담아 들어줘야 한다. 부도난 어음을 일부라도 쓸수 있게 숨통을 틔워줘야 한다. 출판계의 위기는 예정된 것이었다. 누군가가 판을 깨고 새로운 유통질서를 세워야 했다. 지금이 새로운 판을 짜기 좋은 기회다. 서점도 출판사도 독자도 베스트셀러 망령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교훈을 뼈아프게 되새길 때다. 정부에서도 도서관 시설을 확충하는 등의 방식으로 양서출간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해주지 않으면 좋은 책을 출간하는 작가와 출판사가 존립할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값이 싼 책에 알찬 내용을 담으려고 노력하는 출판사에 대해 독자들은 IMF와 상관없이 책값만큼은 아까워하지 않는 자세로 대응해줄 때이기도 하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