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목일에 만난 벽안의 '나무노인'] (인터뷰) 민병갈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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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이 4월의 꽃으로 노래한 목련이 계절에 관계없이 피는 곳이 있다. 400여종의 목련이 번갈아 꽃을 피우는 천리포수목원이다. 충남 태안군 소원면 바닷가 18만평에 자리잡은 이곳은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삼은 한 이방인이 40년간 쏟은 땀과 정성이 배어있다. 서해안의 이름없는 갯마을에 국제적인 "나무의 천국"을 가꿔놓은 주인공은"아메리칸 코리안" 민병갈(78.미국명 칼 밀러) 수목원장이다. 쌍용투자증권 고문으로 서울에 직장이 따로 있는 민 원장은 식목일을 앞두고서둘러 천리포 제2의 집으로 내려왔다. 마침 촉촉이 내린 봄비가 평생을 나무와 함께 산 노인의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다. 8순이 가까운 백발이지만 막 꽃망울이 잡힌 목련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어린이처럼 천진스럽다. "이 목련은 전 세계에서 세 그루밖에 없는 희귀종이지요. 스웨덴 요테보리 대학의 나젤리우스 토르(85) 명예교수가 배양에 성공한 품종(학명gotoburgensis)인데 세개중 하나는 스웨덴대학에 남아 있고 다른 둘은 영국과 한국에 기증됐어요" 천리포 수목원에서 4월들어 첫번째로 꽃봉오리를 터뜨린 화목은 별목련이다. 삼지닥엔 노란 봉오리가, 새덕이나무는 자주색 봉오리가 맺혀 식목일엔 축하 개화라도 할 듯하다. 하루전에 내린 봄비에 젖어 윤기가 돋는 수선화들은 연못가에서 노란 군무를펼칠 준비를 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에서 회화나무 심기 운동을 벌이는데 이곳에도 있나요? "있다 마다요. 25년전 한국은행에 다닐 때 한은 마당에 있던 나무에서 가지를 꺾이다가 삽목한 것이 지금은 아름드리가 됐죠. 한은 회화나무는 새 건물을 지으면서 사라졌지만 그 분신은 이곳에서 잘 자라죠. 한국에선 예로부터 회화나무를 상서로운 나무로 받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천리포 수목원이 이만큼 커진 것도 회화나무 덕인가 봐요" 민 원장은 회화나무가 서있는 곳으로 안내하며 서양인 특유의 익살로 내방객을 웃긴다. 7구역으로 나눠진 수목원의 본원에서 명당으로 꼽히는 정자옆에 심어진 회화나무는 오랜 풍상에도 끄떡없이 잘 자라고 있다. 아직은 잎이 안 나와 앙상해 보이지만 6월이 되면 우람한 자태를 드러낸다는설명이다. -이렇듯 대규모 수목원을 차리기 까지엔 곡절도 많았겠군요. 나무마다 이름과 학명을 일일히 기억하시는데 식물학을 전공하셨는지.. "난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어요. 나무와는 인연이 멀었지만 수목원을 하다 보니 열심히 배우게 됐죠. 서울대학교 농대 임학과 최창복 교수(은퇴)와 임업시험장 조무연 연구관(작고)의 도움이 컸습니다. 외국에 나갈 때마다 그곳의 이름있는 수목원을 찾아 자문을 구했지요." 수목원의 원장 사무실을 채운 전문서적과 표본집들을 보면 그의 개인 연구경력을 알만하다. 10여년전부터 청력이 떨어져 보청기를 사용하는 그는 듣는 것 보다 말하는 것이 편하다. 태평양 전쟁중 미 해군에서 일본어 통역장교로 복무할 때는 일어가 유창했으나 이제는 그 외국어 실력이 한국어로 바뀌었다. 한국신문도 가끔 읽는데 한자가 줄어 아쉽고 동양정서에 안맞는 가로쓰기도 불만이다. -한국에 귀화하신 지가 올해로 20년째인데 이 땅에 그토록 애정을 갖게 된 특별한 동기라도.. "내가 한국인을 처음 본 것은 1944년 말 오키나와에서 였어요. 당시 나는 미군장교로 일본군 포로들을 신문하는 직책에 있었는데 포로중엔 부산에서 끌려 온 한국인 정신대원이 있었지요. 겁에 질려 있는 포로소녀들의 표정에서 따뜻한 인간미를 읽고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어요. 세상에 이런 소박한 민족이 있나 싶었죠. 그래서 나는 동료장교들이 꺼리는 한국상륙 선발대를 자원했습니다. "당시 칼 밀러 중위는 일본이 항복한지 23일만인 45년9월8일 미군함정을 타고 인천에 상륙, 서울로 진주했다. 대원12명과 함께 중앙우체국 통신시설을 접수한 그는 조선호텔 마당에 텐트를 치고 한국땅에서의 생애 첫밤을 보냈다.(조선호텔측은 이 날의 50주년을 기념하여 95년9월8일 성대한 파티를 열어주었다) "군용차로 경인 가도를 달리면서 시야에 펼쳐진 한국의 자연을 보고 나는 또 한번 자신이 빨려 들어가는 자력을 느꼈습니다. 첫 눈에 느낀 한국에 대한 강렬한 인상은 54년이 지난 지금도 내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어요. 이제 생각하건대 한국은 나에게 전생의 인연이 있었나 봐요" 민 원장은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는 한국생활이 시작됐다. 군정청 근무-제대후 미국기관 AID(원조처)근무를 마치고 49년부터 82년까지 33년동안 한국은행에서 일했다. 환갑나이에 그는 다시 증권 맨으로 변신했다. 한양증권(82~86)에 이어 쌍용 투자증권에서 13년째 고문직 맡고 있는 그야말로 만년 현역이다. 60년대 말 수목원이 터전을 잡은뒤 부터 30년간 평일엔 서울로, 주말엔 천리포로 왕복 4백km를 오가는 시계 추같은 인생을 살아오고 있다. -천리포에 수목원을 차린 계기가 있을텐데요. 기후조건이 맞는다든지.. "한국은행 재직 때 송인상(전 한은총재-재무장관.작고)씨와 만리포로 해수욕을 자주 왔지요. 그런데 천리포에 산다는 한 노인이 송씨 별장으로 여러차례 찾아와 자기네 야산을 사달라고 통사정하는 바람에 돕는 셈치고 62년 여름 6천평을 산 것이 계기가 됐지요. 나무를 본격적으로 심기는 1만평을 추가로 매입한 66년 봄부터 입니다. 천리포는 해풍이 심하고 염해가 많아 수목원 조건으로 안 좋지만 토질이나 기온은 괜찮아요. 해풍문제는 방풍림으로 곰솔을 심어 해결했지요. -20만평 가까운 수목원을 운영하려면 적잖은 자금이 필요했을 텐데요. "미국 펜실바니아 고향에 있는 재산을 처분한 것이 밑천이 됐고 증권투자와 펀드운영 수입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그러나 이제는 나이도 많고 기력도 떨어져 전같은 수입이 없으니 걱정입니다. 사재로 이만한 수목원을 운영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작년초엔 서울대학교 총장을 만나 대학에 기증하는 문제를 협의했으나 절차상의 이견을 좁히지 못했어요. 그 대안으로 뜻있는 분들이 후원하는 회원제를 작년4월부터 시행하고 있습니다. 외국에선 수목원을 돕는 재력가들이 많이 있는데... -회원제 운영 방법과 그동안의 성과는. "일반-학생-기관-기부회원으로 분류, 후원금을 받고 견학기회 등 편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난 1년간 2백80명이 회원으로 참여하여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그러나 연간 3억원에 육박하는 운영비를 계속 감당하기가 힘들군요. 궁여지책으로 직원들은 수목원의 유료개방을 주장하지만 훼손우려 때문에 회원에게만 보여주도록 제한하고 있습니다. 올해부터는 묘목을 만들어 회원들에게 염가로 공급하고 계약재배사업도 본격화할 계획입니다." 민 원장은 반세기 넘게 살면서 많은 한국인 친구들을 두었다. 수목관계의 임학자 말고도 교유 폭이 넓다. 민병도 전 한은총재, 신병현 전 부총리, 정인영 전 한라그룹회장은 6.25전부터 사귄 친구들이다. 송인상 전재무장관, 최병우 전 코리아 타임스 편집국장, 이응로 화백과 가까웠지만 모두 고인이 됐다. 서화를 좋아하는 그는 김기창-박래현부부와 오래 교유했고 노옥순 전 이대 박물관장과도 가깝다. 그러나 소주와 김치를 좋아하는 민 원장이 즐겨 어울리는 상대는 이름없는 촌로나 소박한 이웃사촌들이다. -평생 독신을 지키시는데.. 후손도 없이 외롭지 않으세요. "나는 수목원과 결혼했으니 나를 독신으로 보면 안되죠. 내 자손은 수목원에 자라는 수백만 그루의 나무와 풀들입니다. 내가 죽은 뒤에도 내 분신과 같은 나무들은 수백년 더 살겠지요. 나는 그들이 살아 갈 생명의 토양이 한치도 줄지 않도록 내무덤을 만들지 말도록 할 작정입니다. 내 시신은 화장돼 한줌의 재로 남아 이 수목원에서 자라는 나무들에게 거름이 되어 줄 겁니다." -끝으로 한국 최초의 펀드(사설) 매니저로서 증권투자자들에게 조언을 해 주신다면.. "증권투자는 욕심을 내거나 서두르면 안됩니다. 유망한 종목을 골라 3~4년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웬만큼 경력을 쌓고 확신이 서지 않았다면 신용거래를 해서는 안돼요." 외국인 돈을 포함하여 약 3백억원의 주식자금을 관리하는 그는 홍콩경제지 "파 이스트 이코노믹 리뷰"에서 유능한 펀드 매니저로 소개되기도 했다. 서재로 자리를 옮긴 그는 긴 이야기가 피로했는지 자주 눈을 감는다. 지나온 한국에서의 반세기가 새롭게 주마등처럼 그의 눈 언저리를 감도는 것일까. 8순을 눈앞에 두고도 "수목원 발전 2백년계획"을 열심히 짜는 것을 보면 그의 마음은 아직도 청춘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