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노트] (20세기를 이끈 경제학자들) (10) 프리드먼 <4>

이지순 "일정한 비율로 통화량을 증가시켜나가는 일은 이 지상을 경제활동의 불규칙한 변화가 전혀 없는 천국으로 변모시키지는 못하지만, 물가안정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게 함으로써 평화롭고도 풍요한 사회를 건설하는데는 크게 이바지한다" - 프리드먼의 "화폐이론에서의 반 혁명" 중에서 -------------------------------------------------------------------- 프리드먼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시장의 자율기능을 중시했던 고전학파의 경제이론을 부정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을 옹호한 케인즈의 학문적 업적이 근본부터 틀린 것임을 증명한데 있다. 이로써 국가중심의 전체주의로 흐를 뻔한 세계경제의 조류를 시장중심의 고전적 자유주의로 되돌려 놓았다. 중국의 변화나 소련체제의 붕괴에서 보듯이 이 세상의 보다 많은 인류가 국가의 억압과 강제로부터 해방돼 예전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가운데 보다 나은 경제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은, 세계를 지배하는 사상의 조류가 60년대를 정점으로 해서 전체주의에서 자유주의로 회귀한 데 힘입은 바 크다. 이러한 사상적 조류의 회귀를 가능하게 한데엔 경제학에서는 하이예크와 더불어 프리드먼이 당시의 주류를 이루던 국가 중심의 케인즈 경제학에 굴하지 않고 자유시민 중심의 시장경제이론을 꾸준히 전파해 온 공이 가장 크다. 케인즈를 극복함에 있어 프리드먼의 공은 화폐이론에서 가장 빛난다. 케인즈는 세계대공황을 예로 들어 경제부흥에 있어 화폐정책은 무력한 반면 재정정책은 아주 유효하므로 정부가 경제활동에 보다 더 광범위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참여할 것을 권고했다. 케인즈의 주장은 상당히 큰 반향을 불러왔으며 30년대이래 전세계에 걸쳐 국민경제에서 정부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을 급격히 증대시켜 온 중요한 계기가됐다. 이에 대해 프리드먼은 세계경제가 대공황에 빠지게 된 것은 경제활동이 위축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은행이 통화공급량을 늘리기는 커녕 오히려 이를 대폭 감소시킴으로써 극심한 금융경색을 야기시킨 데 가 장 큰 원인이 있음을 입증했다. 금융경색은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가치의 폭락을 가져왔으며 이는 다시 은행과 기업의 대규모 연쇄 도산으로 이어져 대공황이 일어난 것이란게 그의 주장이다. 화폐정책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재정정책의 중요성만 강조한 케인즈의 주장은옳지 않다는 얘기다. 프리드먼에 따르면 경제활동에 영향을 주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화폐정책이 무력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화폐정책이 지닌 긍정적인 효과는 살리면서 그것이 잘못되었을 때 일어나는 엄청난 폐단을 최소화하는 것이 관건이라게 그의 지론이다. 프리드먼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보장함으로써 화폐정책이 정치논리에 따라 좌우되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중앙은행이 독립성을 지녔다는 것을 빌미로 해 화폐정책을 방만하게 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선 화폐공급량을 매년 같은 비율로 증가시켜 나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재정정책에 관해서는, 경제활동에서 차지하는 정부의 영역이 확대되면 될수록 그만큼 개인의 자유는 더 크게 제약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제활동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사라져 결국 경제활동 자체가 크게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정부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영역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주장을 편 것은 그래서다. 선.후진국을 망라해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던 케인즈에 대해 반기를 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이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그 결과 60년대만 하더라도 케인즈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다수였으나 이제는 정부가 지닌 힘을 활용해 자기의 이상을 구현해보고자 하는 극소수의 반 자유주의자들만이 여전히 케인즈를 따르고 있을 뿐 대다수 서방 경제학자들은스스로를 시장주의자로 자처하게끔 됐다. 그러나 반 자유주의자들이 각계에서 득세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은 불행히도 이와는 거리가 멀며, 정체도 수상한 제3의 길이 유행인 것을 보면 이 땅에서 자유주의가 꽃을 피우기는 아주 어려운 일인 듯 싶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