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54) '이병철..'

[ 이병철 회장의 연구소 구상 ] 남산(중앙정보부)이 개입했지만 윤태엽 총무부장의 기지로 간신히 이정림회장은 재선됐다. 63년7월29일 회장선출을 위해 소집된 정기총회장의 분위기는 썰렁했다. 아슬아슬한 표대결이 벌어졌으니 그럴만도 했다. 경제인협회가 양분됐다는 사실을 눈치챈 새 회장단은 대부분 총회석상에서사의를 표명했다. 갓 선출된 이한원 부회장, 홍재선 부회장 등은 물론 재선된 이정림회장 마저 그만 둘 뜻을 밝히고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다만 최태섭 부회장(한국유리 창업주)만 앞좌석에 혼자 가만히 앉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회장, 부회장께서 죄다 안하시겠다고 하니 나마저 사의를 표하면 협회는 문자 그대로 와해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만이라도 부회장에 머무르면서 이 위기를 수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수습된 후 곧 물러 나겠습니다" 회의장에 남아있던 회원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총회 후 산산조각이 난 협회를 다시 단합시키기 위해 윤태엽 부장과 나는 다음날 아침부터 중진회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협회의 결속을 부탁했다. 아울러 경제위기 타개 대책도 상의했다. 바로 이맘때로 기억된다. 이병철 초대 경제인협회 회장(삼성 창업주)이 돌연 윤태엽 부장과 나를 만나자고 했다. 이때까지 이병철 회장을 몇번 만난 일이 있었지만 왜 갑자기 만나자는지 궁금했다. 특히 당시 신문들이 B호텔, G호텔 운운하면서 민간 경제계의 불협화음을 소개하고 있을 때라 조심스럽기도 했다. 반도호텔(B호텔)에 사무실을 갖고 있던 이병철 회장과 그랜드호텔(G호텔)에사무실이 있는 이한원 사장이 경제인협회 주도권을 잡기 위해 계속 불협화음을 낸다는 가십성 기사들이 연일 신문에 넘쳐날 때였다. 만난 장소는 반도호텔이 아닌 옛 조선호텔로 기억된다. 이 회장이 장소 선택에도 상당히 신경을 쓴 흔적이 느껴졌다. 이회장은 서서히 특유의 차분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우선 격식을 갖춰 어려운 때 경제인협회를 이끌어가느라 수고 많다며 우리 두 사람을 격려했다. "지난번 총회와 또 요즘 움직임을 보니 이대로는 경제인협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없을 것 같소. 그러니 두분이 나하고 같이 새 연구소를 만듭시다.예산은 필요한대로 내가 지원하지요. 우리나라 일급인사들로 연구소를 조직합시다" 이 회장은 이미 58년 자유당 말기부터 "한국경제재건연구소"를 설립해 운영했었다. 주요한(부흥부) 김영선(재무부) 등 당시 각료를 지낸 중진들이 총 망라돼 있었다. 그런 그가 다시 연구소를 만들겠다고 한 것이다. "두 분이 협회를 떠나 나를 도와주면 연구소에서 발굴한 공업화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천만 뜻밖의 제안이었다.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남달리 치밀한 이병철회장이 오래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한 말로 느껴졌다. 고민스러웠다. 윤 부장과는 사전 협의도 안했기 때문이다. 순간 윤부장과 내 의견이 다르면 어떻게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윤부장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윤 부장의 생각을 감지하고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윤부장이 먼저 입을 뗐다. "이회장님 참 좋은 생각이십니다. 방향 감각을 잃고 있는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새로운 구상을 제시해야 합니다" 우선 취지에는 찬성한다고 운을 뗀 뒤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데 이회장이 생각하신 연구소는 경제인협회내에 두도록 하면 더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지금 경제인협회는 비온 뒤 땅 굳는 격으로 점차 결속을 다시 찾아 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 이 회장께서 별도로 연구소를 만드시면 오해를 받을 염려가 있습니다" 솔직하고 소신에 찬 윤 부장에 말에 호응해 나도 이어 갔다. "회장님, 연구소 구상은 꼭 실현시켜야 합니다. 다만 경제인협회는 지난 1월우리나라 최초의 싱크탱크로 경제.기술 조사센터(현 한국경제연구원)를 발족시켰습니다. 이 센터의 설립취지와 이회장님 연구소 구상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윤부장 의견대로 이회장께서 이 센터를 연구소로 발전시키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연구업적이 쌓여지고 예산 뒷받침이 되는대로 연구소로 발전시킬 계획으로 이 센터를 설립했었습니다" 이 회장은 두 젊은이가 당돌하게 말을 이어가자 허를 찔린 듯 물끄러미 우리를 응시했다. 이 회장의 제안이 아래사람으로부터 이렇게 거부당한 일은 아마 별로 없었을것이다. "생각은 알겠지만 경제인협회 안에서 연구소가 제대로 발전할 수 있겠소..." 이 회장은 사무국을 이끌어가는 우리 두 사람의 의견을 존중해주기로 마음을정하고서도 일부 회원들의 사려 부족한 행동이 몹시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후 이 회장은 연구소 문제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당시 나는 경제인협회의 단결을 다지는 의미에서 별도 연구소 설립을 반대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이회장의 적극적 지원을 얻어 명실상부한 연구소를 설립.발전시키는 것이 한국경제나 사회를 위해 더 나은 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 회장은 역시 "인물"이었다. 자신의 생각대로 하지 않은 우리에 대해 전혀 뒤끝이 없었다. 오히려 사무국장인 나와는 더 가까워졌다. 나는 경제가 표류할 때면 수시로 이 회장을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또 이회장도 민간경제계가 나서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나를 자주 불렀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