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로 치닫는 세기말적 사랑 .. 박범신씨 소설 '침묵의 집'

작가 박범신(53)씨가 8년만에 장편소설 "침묵의 집"(전2권, 문학동네)을 내놨다. 93년 절필을 선언했다가 96년 중편 "흰 소가 끄는 수레"로 문단에 복귀한 뒤처음 펴낸 장편이다. 경기도 용인 ''한터산방''에서 일주일에 1~2일씩 글을 쓰며 명지대 문예창작과교수로 출강중인 그는 "첫소설을 선보이는 신인같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처절한 사랑을 통해 삶의 실존적인 문제, 즉 생성과 파멸의 의미를 그리려고 했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중견기업 자금담당 이사인 김진영.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남편으로 평범하게 살던 그는 삶에 대한 회의와 자기모멸에 사로잡힌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그는 "장감장감, 마치 어린 나비가 춤추듯" 걸어가는 한 여자를 만난다. 시인이면서 그림을 그리는 여자 천예린. 그녀는 내면 깊숙한 곳에 잠복해있던 옛 꿈을 되살리며 그를 화톳불처럼 뜨겁게 달군다. "사십대 말의 황황한 나이에 만났던 실존의 무섭고 황홀한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오로지 그녀만을 향해 온 몸을 던지는 파멸의 유랑길로 접어든다. 그는 "내 생의 마지막에 찾아와서 뒷덜미를 사정없이 후려친 여인, 그녀와의광포한 사랑에 나는 매일 죽었고 매일 다시 살아났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낭만적인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광포한 에로티시즘과 죽음의 광시곡이다. 떠나간 천예린을 쫓아 아프리카 대륙과 시베리아를 거쳐 북극해까지 횡단하는 김진영. 고통에 찬 술래잡기 끝에 두사람은 마침내 미친 듯한 사랑의 축제를 벌인다. 이윽고 눈보라치는 이역에서 죽음을 맞는 여자. 바이칼 호수의 한 섬에서 예린을 잃고 한국에 돌아온 진영도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소설의 중심부를 이루는 것은 죽음을 불사하는 이들의 여정이다. 변태적이고 잔혹한 성애, 광란에 가까운 사랑을 작가는 열반에 도달하는 엑스터시로 승화시킨다. 파멸과 생성의 이중주를 통해 해탈의 경지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것은 냉혹하리만치 객관적인 시각 때문에 설득력을 갖는다. 은유와 상징으로 응축된 문장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긴장과 절제를 조율하는 솜씨, 프로이트의 심리분석을 떠올리게 하는 내면 묘사도 탁월하다. 산문시를 연상시키는 문체 또한 명징하다. 작품의 배경에 깔린 바이칼 호수, 아프리카 케냐의 만년설, 스코클랜드 해변등은 단순한 풍광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체계와 대비된다. 그곳에 얽힌 신화.전설과도 접목돼 작품의 울림을 크게 한다. 또 한가지. 세기말 중년의 사랑을 2000년이라는 시점과 포개어 놓는 방식이다. 진영의 아들 선우가 아버지의 행로를 더듬어가면서 20세기의 영혼을 21세기의 프리즘으로 비춘 구조다. 이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통로"이자 실존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