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올가' 한반도 강타'] '상습 침수 원인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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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같은 곳에서 겪는 물난리는 천재인가. 물론 아니다. 특히 경기도 연천 동두천 파주.문산, 서울 노원마을의 수해는 "관재"였음이확인되고 있다. 이들 지역은 집중호우가 내릴 때마다 매번 피해를 당한 곳들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지자체들은 뒷북치기식 "판박이" 대책으로 일관, 눈앞에서 집이 물에 잠기는 아픔을 주민들에게 또다시 안겼다. 특히 일부 지역에서는 관련부처간의 떠넘기식 행정으로 수방대책을 제때 마련하지 못해 수마를 불러들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에따라 주민들은 "물난리 반복은 재난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한 국가의 책임"이라며 집단 손해배상 소송까지 내겠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파주.문산 =이 지역은 지난 96년 대홍수 당시 읍을 끼고 도는 동문천이범람, 순식간에 주택과 상가 2천7백20여채가 물에 잠기고 이재민 3천7백여명을 냈었다. 시는 같은해 11월 동문천 둑 높이를 2m 높이기로 했다. 또 동문천을 가로 지르는 경의선 문산철교 앞뒤 철로 구간과 통일로 문산1교의 지반 높이를 각각 2m씩 높여 재가설키로 했다. 그러나 수해 1년4개월이 지난 97년 11월 동문천 둑 높이기 공사가 착공돼 지난해말 문산읍 주변 1.2km구간이 우선 준공됐을 뿐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특히 문산철교와 문산1교의 지반 높이기 공사는 아예 구체적인 공사계획 조차 마련돼 있지 않거나 미착공 상태다. 시와 행정자치부, 철도청 등 관련 기관이 2백억여원의 사업비 부담 책임을놓고 협의를 지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동문천은 문산읍 주변 둑 높이가 2m 높아졌지만 문산철교와 문산1교부분은 이전 그대로여서 상대적으로 2m가 낮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주민들은 "문산읍이 지난달 31일부터 집중폭우가 내리자 문산철교와 문산1교에 흙마대로 임시 둑을 쌓았으나 끝내 수압을 이기지 못해 이 곳으로 동문천이 범람해 침수되고 말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동두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시내를 관통하는 신천이 범람해 생연 보산 상패동 일대가 침수됐다. 신천의 최대 강폭은 1백20~1백30m. 이중 소요교~상봉암교 사이 6km 구간의 하천폭은 90m로 좁아 해마다 병목현상으로 인한 범람이 빚어지는 곳이다. 동두천시는 지난해 수해 뒤 이중 4.8km구간에 대한 하천폭 넓히기와 제방쌓기 준설공사 등에 착수했지만 예산이 늦게 배정돼 고작 4백m 구간의 하천폭을 넓히는 데 그쳤다. 이 일대 저지대 주민들은 신천에 배수펌프장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으나 "예산이 없고 이주대책이 쉽지 않다"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다. 결국 강폭이 좁아진 지점부터 물이 범람했고 신천 주변에서는 하수도까지 역류, 생연 중앙동 일대 2천여가구가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다. 연천 =이 지역은 3년전과 똑같은 지점에서 비슷한 유형의 피해를 입었다. 연천군은 96년 수해뒤 2백10억원을 들여 연천읍 주변 차탄천 20km구간에대해 준설 제방높이기 등 하천개수 공사를 끝냈다. 그러나 차탄천이 만수위까지 차오르자 하수구를 통해 물이 역류했고 제방이범람했다. 충분한 배수능력을 갖춘 유수지를 갖추지 못한 때문이다. 또 연천댐도 홍수조절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고 있다. 서울 노원마을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물벼락을 맞아 인근 학교로 대피한 노원구 상계1동 노원마을 주민들은 서울시와 의정부시의 떠넘기식행태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주민들은 "노원구청에 임시로 막아놓은 10여m의 흙벽을 콘크리트 제방으로쌓아줄 것을 수십차례 요구했으나 장마를 앞두고 모래마대만 몇개 더 얹었을 뿐"이라고 흥분하고 있다. 구청측은 "무너진 제방은 의정부시 관할이어서 제방축조를 요구하는 공문을보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정부시는 "예산문제 때문에 장마가 끝난후에나 공사가 가능하다"며흙더미 몇군데를 손보는 데 그쳤다는 것. 노원구청도 지난달 20일쯤 공익근무요원 30여명이 나와 모래를 담은 마대로50cm가량 제방을 돋운 것이 전부였다. 주민들은 "지난해 마을 사람들은 1천만원 이상 대출을 받아 복구작업을 벌였는 데도 관청은 서로 관할만 다퉜다"고 분개했다. 일부 주민들은 당국이 하수구에 물막이만 제대로 설치해 놓았더라도 피해를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