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감시대] (88) 제1부 : 1997년 가을 <8> '정복자들'

글 : 홍상화

"박정희는 청와대에서 필요한 돈을 비서실장이나 경제수석이 해당 기업에 어떤 형태로든 메시지를 전하면,그 기업의 총수와 면담이 허락되었지.기업의 총수는 대통령을 별실에서 만나 간단히 서로 덕담을 나누고 독대가 끝난 후 비서실장에게 수표를 전했지.그러면 비서실장은 국세청장에게 기업체 명과 정치자금 기부금액을 직접 연락해줬지.그것은 기업실사 과정에서 정치헌금이 어떤 다른 명목 경비항목으로 기재되어 있더라도 그 금액에 한하여 더이상 캐지 말라는 목적이었어" 도만용 부총재가 신이 나서 아는 체를 했다. 백인홍도 더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 시대는 정치자금을 그렇게 공개적으로걷어들였나요?"

"박정희는 정치자금이 기업의 경리 투명성에 악영향을 끼칠까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것 같아" "그때도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부정이 심했잖아요?"

"당 운영비를 비롯한 정치자금을 주로 조달한 것은 당의 실력자들이었어.그래서 정치자금을 모금한다는 미명 아래 숱한 부정이 자행되었지.그러나 청와대에서 취급한 정치자금 규모는 청와대 사용 목적에 제한되어 있었어"

"전두환 정권 시절은 어땠어요?" "전두환은 과거 박정희 정책 말기에 보안사령관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이 정치자금 모금이라는 미명 아래 부정축재를 일삼은 행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지.그래서 그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당비에 필요한 자금이건 정치자금이건 청와대 돈이건간에 정치자금을 직접 거둬들이기로 한 듯해.그 시점부터 대통령직에 있는 사람이 방대한 여당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정치자금과 선거 때의 선거비용을 전담하게 되는 선례가 생겨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기까지 계속되었지"

"기업에서는 정치자금을 어떻게 회계처리했나요?"

백인홍은 실제로 궁금하였다. 매장 매매건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전두환의 정치자금 모금 수법은 공개적이어서 정치자금을 본인이 직접 거둬들였을 뿐만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에서 공식적으로 영수증까지 발행했다고 해"

"박정희와 전두환 두 사람의 수법에 있어 또 다른 점은 없었나요?"

"기업하는 사람들은 박정희를 너무 어려워해서 정치자금을 제공하겠다는 명목을 내세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고,박정희 자신 또한 비교적 건실한 대기업을 골라 정치헌금의 대상으로 삼았지.하지만 전두환은 그렇지 않은 듯해"

"두 사람은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지요?"

"그럼,무자비할 정도로 냉철할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위와 위엄을 정치자금 때문에 희생하고 싶지 않았던 박정희가 취급한 정치자금의 규모는 전두환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또 절대 필요액 이상은 거둬들이지 않았음이 그의 사후 청와대에 남은 정치자금이 미미했다는 사실로 증명되었잖아"

"아무리 박정희가 노력했다 하더라도 권력 주위의 부패는 막을 수 없었겠지요"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하게 되어 있어"

도만용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