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감시대] (124) 제1부 : 1997년 가을 <12> 음모 (2)

글 : 홍상화

황무석이 앞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목을 축인 후 다시 김규정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기업은 역시 젊은 사람이 이끌어가야 해요. 진 회장은 나이가 아마 김형하고 비슷할 거예요. 서른일곱이지요. 회장직에 취임한 후 일요일을 포함해 하루도 쉰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부인의 두번째 임신이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유산된 날 하루 절망감 때문에 쉰 걸로 알고 있어요. 주위에서 진 회장을 가리켜 워커홀릭,즉 "중증의 일 중독자"라 부르지요. 그러면 진 회장은 "일에 취해서 평생을 보낸다면 그것보다 멋진 인생이 어디 있느냐"라고 응수하곤 했지요"

황무석이 다시 커피로 목을 축이면서 숨을 가다듬었다.

수사팀장인 김규정 계장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하며 듣든 데도 이미 지쳐 있는 듯했다. "아,참...제가 무슨 얘기를 하려다가 그만 포인트를 놓쳤습니다.
무슨 얘기를 했었지요?"

황무석은 김규정의 감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큰소리로 물었다.

김규정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황무석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을 취했다.

그러자 김규정이 마지못해 앞에 놓인 우유잔을 들어 보였다.

황무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김규정이 이제는 어이없어 하는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우유잔을 흔들어 보였다.

김규정의 그런 모습은 정신집중이 잘 안 되는 노인에게 경계를 푸는 모습임이 분명해 보였다.

황무석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참...그렇지요. 우유 얘기를 했었지요. 그래요,제가 반포에 있는 20평짜리 아파트에 이사 갔었지요. 기름보일러로 난방이 되는 곳,그것도 하늘 위에 덩그렇게 올라앉은 6층에 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요. 아마 그때가 저와 제 처가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황무석은 감회에 젖은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 한 달 후쯤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그때 제 첫애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우유를 마시지 않는 거예요. 아무리 야단을 쳐도 막무가내였어요. 때려도 울면서 마시지 않는 거예요"

황무석의 눈이 충혈되어갔다.

"그런데 나중에 아내한테서 자초지종 이유를 들었어요... 문교부 정책에 따라 학교에서 급식을 하게 되었는데 지원자가 많지 않아 아파트 평수가 작은 집안 아이부터 강제급식을 했다는 거예요. 우리 집이 반포에 있는 아파트 중 가장 평수가 작은 20평이었거든요... 급식 중 특히 우유를 강제로 마시게 해 우리 애가 그때 집에서 우유를 마시지 않으려고 했던 거예요"

마지막 말을 끝낼 때 황무석은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였고 그런 분위기에 젖어 김규정은 방금 전과는 달리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너무 제 얘기만 한 것 같군요. 늙은이가 다 되어 주책이 심해졌나봐요"

황무석이 언제 그랬더냐 싶게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말씀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그때는...그랬군요"

김규정이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