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과학자의 여유와 연구실적..박성래 <한국외대 교수>

박성래

올해 노벨화학상은 일본 쓰쿠바대학의 시라카와 히데키(白川英樹·64) 명예교수가 받았다.이로써 일본은 모두 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두게 됐다.

서양 몇 나라를 빼고는 가장 많은 숫자다.

특히 일본은 경제학상을 제외하고는 모든 노벨상 분야에서 고르게 수상했다.물리학상 3명,화학상 2명,의학상 1명으로 과학 분야는 모두 수상자를 냈고,문학상 2명,평화상 1명이다.

이제 한국인에게도 노벨상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엔 일본 9대 한국1이라고 생각하기 쉬울지 모른다.하지만 과학 분야의 노벨상은 아직도 전망이 밝지 않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숨은 이야기가 시라카와의 수상과 함께 날아들었다.

수상 소식 직후 시라카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연구에 제일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30여년전 한국 유학생의 우연한 실수였다고 회고한 것이다.그리고 그 한국인은 당시 원자력연구소에 근무하던 변형직(邊衡直·73) 박사라는 사실이 국내에서 밝혀졌다.

변 박사가 1967년 도쿄공업대 고분자연구실에서 우연히 만들어냈던 물질이 바로 노벨상을 받게해 준 전도성(傳導性) 폴리아세틸렌(플라스틱)이라는 것이다.

변 박사는 연수를 위해 이 대학에 갔다가 우연히 새로운 물질을 만들었으나,그 의미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연수를 마치고 귀국했다.

그것을 계속해 연구한 시라카와는 그 전도성을 밝혀 논문으로 발표했고,그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이 미국 과학자들에게 알려져 미국에 초청받아 함께 연구한 결과 이들 3명이 이번에 노벨 화학상을 공동수상하게 된 것이다.

''노벨 아차상''이란 것이 있다면,한국인에게 그것이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노벨상도 ''밑천''이 있어야 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33년전 한국 유학생은 더 풍족하고 과학 수준도 높은 일본에 유학을 갔고,시라카와는 연구비가 넉넉한 미국 대학에 초청돼 갔다.

한국 유학생은 ''실수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일본에 제공했고,일본 화학자는 그것을 연구논문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미국에 알려져 미국 화학자들과 공동연구에 들어갔다.

여기 노벨상을 받는 두 가지 길이 보인다.

하나는 외국 유학생을 불러다가 연구시켜 그들의 ''실수''를 기다리는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외국인 유학생을 데려다 새로운 실험을 시킬 정도가 못된다.

한국 과학자가 유학생의 실수를 활용해 횡재(?)하는 일은 당분간 없을 듯하다.

다음 방법은 싹수 있는 외국 과학자를 초청해 한국인과 공동연구자로 만드는 방법이다.

이 두번째 방법은 비슷한 경우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 이 땅에 초청돼 오는 과학자들은 대개 이름있는 선진국 과학자로,나이가 들어 연구에는 퇴물이 된 경우가 많다.

첨단 분야를 한국 과학자와 공동연구하려고 오는 사람은 드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두번째 길도 어렵다.

그렇다고 조급하게 서두른다 해서 우리 과학 수준이 높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라카와는 "실수를 그냥 넘기지 말라"는 충고를 했다.

또 그는 과학자는 여유롭게 연구하도록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교수가 되기 전의 조수(助手)생활 10년이 가장 생산적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바로 한국 과학자가 가 있던 그 시절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지도교수를 도와 주는 일을 조금 하고는,나머지 시간을 몽땅 자유롭게 자기연구에 활용할 수 있을 때 새 발견,좋은 연구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국의 대학은 온갖 평가와 연구 성과, 독촉 등으로 자꾸만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아마 연구소의 분위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연구소의 경우는 구조조정입네 하는 소용돌이 속에 그 난기류가 더 심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노벨 아차상''이 진짜 ''노벨상''으로 바뀌기 위해서라도 과학자는 자유로워야 한다.

과학자 만이 아니라,모든 연구자는 자유시간 속에서 창조적일 수 있다.

학문은 자유를 먹고 산다.물론 그런 기회를 이용해 정말로 ''놀고 먹는'' 교수와 연구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학자로서의 도덕성 문제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