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삶의 경제학' 高手가 되기를..서지문 <고려대 교수>

서지문

사람의 삶은 하나의 지속적인 경제행위라 할 수 있다.우리의 생은 부모에게서 목숨을 얻어서,부모님으로서는 투자라고 할 수 있는 ''양육''을 받아서,경제활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어른''이 되어서,남에게 신세를 지기도 하고 선심을 베풀기도 하면서 이럭저럭 살다가,부모님께 진 빚을 대강 갚기도 하고 못 갚기도 하고 결국 목숨을 잃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생의 종말에는 우리 스스로,또는 다른 사람이 우리의 생을 결산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손익계산을 하고 산다.일을 할 때는 보수를 계산하고,장사를 할 때는 흑자를,투자를 할 때는 이윤을 기대한다.

인간관계도 우리는 무의식중에 투자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호감이 가는 사람이 우리를 좋아해 주지 않으면 속이 상하고,''순수한 선의로'' 베푼 일에도(정신적인)보답을 바란다.사실은 이해타산에 입각해 한 일에서 손해 본 것 보다,사심없이 베푼 선행에 대해 감사나 보답을 받지 못하면 몇배 속상하고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니까 우리는 대부분 심리적 경제학에 그리 현명하지 못하다.

모두 타산에 의거해 산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약육강식,무자비한 생존경쟁의 사회가 돼 살벌하고 흉포한 사회가 될 것이다.그래서 종교는 우리에게 타산의 초월을 촉구한다.

그렇지만 종교도 결국 경제적 비유를 써서 이타적인 행위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현세에서 손해를 보며,의를 행하고 인을 베풀면 영생을 얻고,모든 고통에서 해탈할수 있고,또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경지인 군자가 될 수 있다….

즉 옳게 사는 것은 터무니없이 손해를 보는 일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막대한 이익을 보는 투자라는 것이다.

윤리학도 역시 경제적 비유를 안 쓰고는 성립이 안 된다.

윤리학자는 아마도 이수현군의 의사(義死)에 대해서,한사람의 목숨을 구하느라 두사람이 목숨을 잃은 것은 손실이지만,이군의 죽음이 일본인들로 하여금 한국인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했고,유사한 행위를 유발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한 값진, 즉 경제성 높은 희생이므로 숭고한 도덕적인 행위라고 설파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도덕적인 사람이란 행위의 손익계산에 자신의 물질적 이익뿐 아니라 형제 자매 동포 인류의 안위가 미리 입력돼있는 사람이고,위기가 닥쳤을 때 즉각적 본능적으로 자신보다 타인 또는 상위집단의 이익을 위해 고통과 손해를 감수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어쨌든 인간이란 눈앞의 이익보다 일생의 거시적 경제를 잘 운영해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존재임에도,대다수의 보통사람은 늘 눈앞의 손익계산에 정신을 뺏겨 자신의 불행을 자초하고,주위사람에게도 괴로움을 끼치는 어리석은 존재다.

가족이나 의리나 정의나 이런 가치들을 모두 무시, 또는 배반하고 그저 금전적 이익만 추구하다가 결국 생을 결산할 때 통장에 찍힌 숫자 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처량한 사람도 많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원한이니 설욕이니 하는 비생산적인 감정의 노예가 돼 일생을 허깨비를 좇다가 결국 허무를 안고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현명한 사람은 자신에게 최선의 가치환산표를 만들고,그것에 의거해서 살아야 한다.

물질적 손익계산이 귀신같이 빠르고 정확한 사람들이 거시적 생의 경제학에는 백치에 가까운 경우가 많아 놀라게 되는 수가 있다.

작금의 우리나라 경제 위기와 경제구조의 모순은 모두 돈 계산 잘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재산액수와 동일시하고,생의 고독을 경쟁에서 이기는 것으로 채우려하는 사람은 자신도 불행한 인간이지만 우리 경제를 망치고 사회를 어지럽혀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기업가가 자기의 거대기업이 쓰러져가는데 분식회계를 하고 위장법인을 만드는 등 온갖 불법·탈법적 수단을 동원해 천문학적 액수의 융자를 받아 해외에서 호화 도피생활을 한다는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세계적 피수배자,체포특공대의 추적 목표가 된 그를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 기업가들은 진정한 생의 경제학의 고수가 되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jimoon@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