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法 제정이 능사 아니다 .. 박효종 <서울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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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사회에선 정의로운 사회구축을 위한 법제정 촉구운동이 한창이다.
특히 시민단체들은 부정부패방지법이나 인권법 제정을 촉구하고 가두서명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분명 이러한 법제정 촉구운동은 의미 있다.
하지만 한편 법제정만으로 한국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인가 하는 점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법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관행의 힘을 실감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관행이란 무엇인가?
어떤 명시적인 합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다수의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나''도 그 방식을 따르는 행위가 관행이다.
''나''는 왜 고속버스 표를 살 때 줄을 서는가?''나''는 왜 사진을 찍으면서 ''치즈''보다 ''김치''라는 소리를 내는가?
다른 많은 사람들의 행동에 ''나''의 행동을 맞추지 않을 경우, 왕따를 당하거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관행은 다수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가치가 있을 뿐,효율적이거나 타당하다는 점에서 그 위상을 담보받는건 아니다.왜 우리는 불이 났을 때 달려오는 소방서의 자동차를 ''불자동차''라고 부르는가?
사실 소방서의 자동차는 물을 가득 실었기 때문에 ''불자동차''보다 ''물자동차''라고 불러야 타당하다.
그러나 화재때 119로 구조요청을 할 때 ''불자동차''로 불러야 알아듣지, ''물자동차''라고 부르면 알아들을 수 없다.
혹은 유전자 염색체는 ''지놈''인가 ''게놈''인가?
''알레르기''가 맞는가 ''엘러지''가 맞는가?
왜 우리는 ''에너지'' 등, 미국식 발음표기를 쓰면서 상기상황에선 독일식 발음표기를 쓰는가?
여기에는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인 이유가 없다.
다수의 신문들이 ''지놈''보다 ''게놈'', ''엘러지''보다 ''알레르기''를 쓰기 때문에 ''나''도 따를 뿐이다.
따르지 않으면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바벨탑의 상황''이 재현될 뿐이다.
문제는 관행의 발생이 임의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키는 관행중에는 도덕적 관행이나 효율성의 관점에서 결함이 있는 낡은 관행이 적지 않다는 점에 있다.
뇌물수수의 관행, 대충대충의 관행, 빨리빨리의 관행 등이 단적인 예다.
당연히 부도덕하고 비효율적 관행들을 도덕성과 효율성을 담보받는 관행으로 대체키 위해 정부가 법을 통해 개입하는 경우가 꽤 있다.연호를 단기에서 서기로 고치기도 하고, 척관법을 미터법으로 바꾸기도 하며, 맥큔.라이샤워 표기법을 우리 주체성에 맞는 전자법(轉字法)으로 바꾸기도 한다.
혹은 원조교제의 관행, 매매춘의 관행도 법으로 금지한다.
그렇지만 관행이란 일단 한번 정착되면 상당한 안정성과 구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법을 제정하더라도 이를 수정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오랫동안 정부는 이중과세를 없애고자 갖은 규제를 했으나 실패하고,지금은 아예 설날로 정하여 민족의 명절로 기리고 있다.
또 관혼상제의 번거로운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 가정의례 준칙을 만들고 처벌규정도 두었으나, 오늘날 가정의례 준칙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결국 법의 제정만으로 사회의 낡은 관행들이 고쳐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관행의 구속성은 법의 구속성을 능가한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법에 대한 관행은 독특하다.
''법 따로 행동 따로''의 관행이 뿌리깊게 정착된 상황에서 법은 우리가 지켜야 할 신성한 규범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우회해야 할 장애물로 치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을 지키면 손해본다는 생각이 일반적이고, 노조도 임금협상과정에서 준법투쟁을 벌인다.
이처럼 법에 대한 냉소적 관행 때문에 교통법도 있고 병역법도 있으며 선거법도 있고 정치자금법도 있지만, 지키는 사람만 바보가 된다.
선거법이나 정치자금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선거에서 승리하고, 정작 법을 지킨 사람은 떨어진다.
같은 맥락에서 인권법이나 부패방지법도 일단 제정하고 난 다음에 지키지 않는 사람이 요령좋은 사람이 되고, 지키는 사람이 곰바우가 되는 역설이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이다.법보다 강한 관행의 구속성이야말로 반부패법 제정운동보다는 부패추방의식개혁 운동으로 불의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이유다.
parkp@snu.ac.kr
특히 시민단체들은 부정부패방지법이나 인권법 제정을 촉구하고 가두서명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분명 이러한 법제정 촉구운동은 의미 있다.
하지만 한편 법제정만으로 한국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인가 하는 점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법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관행의 힘을 실감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관행이란 무엇인가?
어떤 명시적인 합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다수의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나''도 그 방식을 따르는 행위가 관행이다.
''나''는 왜 고속버스 표를 살 때 줄을 서는가?''나''는 왜 사진을 찍으면서 ''치즈''보다 ''김치''라는 소리를 내는가?
다른 많은 사람들의 행동에 ''나''의 행동을 맞추지 않을 경우, 왕따를 당하거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관행은 다수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가치가 있을 뿐,효율적이거나 타당하다는 점에서 그 위상을 담보받는건 아니다.왜 우리는 불이 났을 때 달려오는 소방서의 자동차를 ''불자동차''라고 부르는가?
사실 소방서의 자동차는 물을 가득 실었기 때문에 ''불자동차''보다 ''물자동차''라고 불러야 타당하다.
그러나 화재때 119로 구조요청을 할 때 ''불자동차''로 불러야 알아듣지, ''물자동차''라고 부르면 알아들을 수 없다.
혹은 유전자 염색체는 ''지놈''인가 ''게놈''인가?
''알레르기''가 맞는가 ''엘러지''가 맞는가?
왜 우리는 ''에너지'' 등, 미국식 발음표기를 쓰면서 상기상황에선 독일식 발음표기를 쓰는가?
여기에는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인 이유가 없다.
다수의 신문들이 ''지놈''보다 ''게놈'', ''엘러지''보다 ''알레르기''를 쓰기 때문에 ''나''도 따를 뿐이다.
따르지 않으면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바벨탑의 상황''이 재현될 뿐이다.
문제는 관행의 발생이 임의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키는 관행중에는 도덕적 관행이나 효율성의 관점에서 결함이 있는 낡은 관행이 적지 않다는 점에 있다.
뇌물수수의 관행, 대충대충의 관행, 빨리빨리의 관행 등이 단적인 예다.
당연히 부도덕하고 비효율적 관행들을 도덕성과 효율성을 담보받는 관행으로 대체키 위해 정부가 법을 통해 개입하는 경우가 꽤 있다.연호를 단기에서 서기로 고치기도 하고, 척관법을 미터법으로 바꾸기도 하며, 맥큔.라이샤워 표기법을 우리 주체성에 맞는 전자법(轉字法)으로 바꾸기도 한다.
혹은 원조교제의 관행, 매매춘의 관행도 법으로 금지한다.
그렇지만 관행이란 일단 한번 정착되면 상당한 안정성과 구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법을 제정하더라도 이를 수정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오랫동안 정부는 이중과세를 없애고자 갖은 규제를 했으나 실패하고,지금은 아예 설날로 정하여 민족의 명절로 기리고 있다.
또 관혼상제의 번거로운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 가정의례 준칙을 만들고 처벌규정도 두었으나, 오늘날 가정의례 준칙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결국 법의 제정만으로 사회의 낡은 관행들이 고쳐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관행의 구속성은 법의 구속성을 능가한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법에 대한 관행은 독특하다.
''법 따로 행동 따로''의 관행이 뿌리깊게 정착된 상황에서 법은 우리가 지켜야 할 신성한 규범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우회해야 할 장애물로 치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을 지키면 손해본다는 생각이 일반적이고, 노조도 임금협상과정에서 준법투쟁을 벌인다.
이처럼 법에 대한 냉소적 관행 때문에 교통법도 있고 병역법도 있으며 선거법도 있고 정치자금법도 있지만, 지키는 사람만 바보가 된다.
선거법이나 정치자금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선거에서 승리하고, 정작 법을 지킨 사람은 떨어진다.
같은 맥락에서 인권법이나 부패방지법도 일단 제정하고 난 다음에 지키지 않는 사람이 요령좋은 사람이 되고, 지키는 사람이 곰바우가 되는 역설이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이다.법보다 강한 관행의 구속성이야말로 반부패법 제정운동보다는 부패추방의식개혁 운동으로 불의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이유다.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