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한국 관료 幸福論 .. 정규재 <경제부장>

IMF와 구제금융 협약을 체결한 것이 지난 97년 12월3일이었다. 오늘로 만 4년이다. 눈앞의 다급한 과제가 한둘이 아니어서 4년의 경과 따위는 돌아볼 틈도 없다. 당장 주먹만한 글자를 동원해야 하는 큰 이슈만도 무슨 무슨 게이트들이며,공적자금 부실관리며,엊그제는 월드컵 축구 조추첨까지 사건과 사고,행사들이 쏟아진다. 그러다보니 바로 지난달의 WTO협상이나 테러전쟁 따위는 이미 클립에 끼워 망각의 창고 속에 던져놓을 정도다. 이 야단법석에 또 하나의 오버랩이라면 갈수록 강도를 더해가고 있는 쌀 사주기 운동이나 아침밥 먹기 캠페인같은 것들도 있다. 이 비만(肥滿)의 시대에 아침밥 챙겨 먹으라는 자상한 권고는 차라리 골계(滑稽)에 가깝다. 그러나 어리석음의 기념비같은 일이 어디 한 둘에 그칠 것인가. 외환위기는 시장경제라는 보편 종교로의 개종(改宗)을 강요해왔지만 한국인들의 강고한 공동체 정신(?)만큼은 난공불락이다. 돌아보면 금 덩어리에서부터 주식을 거쳐 아침 밥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사회운동의 대상이 아닌 것이 없다. 재벌개혁도 운동이었고 언론개혁도 사회운동 비슷하게 진행되어온 터다. 결국 이기적 개인을 전제로 한다는 자유주의 경제체제는 들어설 자리가 협소해지고 말았다. 운동에서 시작해서 운동으로 끝나고 있는 운동권 정권이라는 냉소가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4년여를 시장개혁에 쏟아부었지만 오히려 시장의 영역은 갈수록 줄어들고 공공의 영역이 팽창하고 있는 것도 실은 부단히 진행된 '운동'의 결과다. 대통령은 "관료들에게도 공적자금 부실 책임을 지우겠다"고 했지만 운동의 깃발아래 몸을 낮게 깔고 있는 관료들의 머릿수와 일거리부터 줄여놓지 않으면 공염불이 될 가능성은 1백%다. 농업이 위기에 선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지만 농업관료들이 위기에 선 적은 한번도 없는 것이 그런 사정을 잘 말해준다. 우루과이라운드가 언제인데 서울에조차 버젓이 농촌지도소(농업기술센터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성업중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농림부는 밥 더먹기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이름도 아름다운 '조식(朝食)진흥과'를 또 신설할지 모르니 모쪼록 조심할 일이다. 물론 관료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책임 없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공무원 중에는 누군가가 책임을 져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많다. 그래야 새 자리가 나고 인사숨통이 터지고 조직은 영원할테니….더욱이 시기로 따지면 개각이 거론되고 연말을 앞둔 인사철이 아닌가 말이다. 감사원의 지적과 연이어 불거진 관료 책임론은 관청 주변 밥집에서는 차라리 복음처럼 울려 퍼진다. 공적자금이 공짜자금처럼 변질되는 것도 운동형 사회구조에서라면 이상할 것이 없다. 거의 모든 금융기관을 '누구도 소유하지 못한 것'으로 돌려 놓았으니 주인 없는 돈,먹는 사람이 임자가 될 밖에.외환위기 이후 가장 큰 변화를 겪었다는 금융부문도 지금에 와서 보면 원위치로 돌아와 있기는 마찬가지다. '재벌의 폐해로부터 차단된 은행'이라는 이념은 모든 은행을 공공기관화해 놓았고 이는 곧 공직자들의 문전옥답이 더욱 확대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은행장으로 배출되기를 기다리는 고위관료가 줄을 서있는 마당에 감히 주인 있는 은행이라니 어불성설이다. IMF 이후 4년여의 고통스런 개혁과정에서 언제나 고위관료만큼은 예외 항목이되어 왔다. 공공성이 강조되고 '운동'이 되풀이되기만 한다면 언제나 공익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그들은 책임부재의 무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