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설 경영전문기자의 '히딩크 경영학'] (3) '재즈처럼 유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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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한 공격 유형은 물론 있다. 그러나 1초도 안되는 사이에도 정신없이 바뀌는 게임을 어떻게 밖에서 통제할 수 있겠나. 선수들이 '알아서' 하도록 맡길 수 밖에..."
시카고 불스, LA 레이커스 등 미국 프로농구(NBA) 챔피언팀을 이끈 명감독 필 잭슨의 말이다.
이 '상식' 같은 얘기를 지키는 감독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감독은 자신의 신념을 명령으로 내리고 선수들은 그 명령에 갇히고 만다.
결과는 어떤가.
마음껏 뛰어보지도 못하고 패자가 된다.
"수비에 치중하다 후반 역습을 노린다"는 명제는 우리 축구팀이 월드컵에 나갈 때마다 펼쳐보인 '비장의 전술'이었다.
찬스를 잡아도 "수비에 치중하라"는 명령 때문에 뒤로 쇼트 패스하고,그러다가 후반에 지쳐 역습도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구조적으로 벌어졌다.
적의 컨디션을 누가 제일 잘 알까.
헉헉대는 숨소리를 듣고 몸으로 부딪혀 '반발 강도'를 체크할 수 있는 선수들 아닌가.
'알아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으니 맥빠진 경기, 이기지 못하는 게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히딩크의 실전 스타일도 잭슨과 같은 '상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선수들이 머리를 써가며 그라운드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배려한 유연한 축구가 그의 작전 중심축에 있다.
"모든 포지션을 소화하라" "공격수도 수비를 하라" "상황변화에 적절히 대처하라"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춰라" "창의적인 플레이를 하라"(신문선이 지은 '히딩크 리더십'에서 인용) 등 그의 말들을 보면 이는 명확해진다.
그의 이런 스타일은 재즈와 닮았다.
재즈의 매력은 바로 즉흥성이다.
비(非)반복성이 특징이다.
일정한 범위내에서 연주자는 마음대로 손가는 대로 노래하고 불어댄다.
청중들이 흥분해 호응하면 한없이 반복할 수도 있다.
양복쟁이들이 시큰둥해하면 간단히 끝내버리기도 한다.
재즈 같은 조직은 그래서 막강하다.
상대로서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지 못한다.
기업 조직과 비교하자면 재즈 조직은 딱딱한 피라미드형 구조와 '군기 빠진' 수평조직의 장점만을 골라가진 유연한 조직 모델이다.
피라미드형 구조는 효율성은 높지만 의사소통 과정이 복잡해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 단점이다.
과거의 우리 대표팀은 '감독→주장 혹은 스타→나머지 선수'로 이어지는 피라미드형 구조로 게임을 했다.
수평조직은 반대로 변화에 발빠르게 대처할 수는 있지만 시행착오가 반복돼 조직 전체의 힘이 약화될 위험이 크다.
피라미드형 조직의 효율성을 살리고 수평조직의 자율성을 가미한 모델이 바로 원칙에 충실하되 즉흥성이 강조되는 재즈형 조직이다.
이런 조직 행태를 갖춘 결과 한국 축구는 아무리 안풀려도 측면 공격만을 고집하거나 뚫리지 않는 정면돌파를 반복하지 않는다.
적의 전형에 따라, 적의 숨결에 따라 선수들이 알아서 기민하게 새로운 공격을 시도할 수 있게 됐다.
재즈형 조직은 매킨지 컨설턴트인 쇼나 브라운과 스탠퍼드대학의 캐서린 아이젠하트교수가 쓴 베스트셀러 '벼랑에서의 경쟁(Competing on the edge)'에서 제시된 아이디어다.
"전략은 변화무쌍할수록 좋다" "유연하게 언제든 바꿀 준비를 하라" "기회는 변화 속에 있다" 등 그들이 생각하는 변화 경영의 원칙은 유연성과 머리쓰는 축구를 강조하는 히딩크의 생각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재즈는 그러나 '아무렇게나'하는 무원칙의 장르는 아니다.
전체 음조를 좌우하는 기본 키가 있고,소절 반복에도 일정한 횟수가 있고, 애드립(즉흥연주)도 일정한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연주자들은 서로 눈으로 이야기하며 실시간 커뮤니케이션 원칙을 놓지 않는다.
재즈가 우리식 신명과 어울려 그라운드의 예술로 승화된 한 판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도록 다듬어진 우리 선수들은 한게임 한게임을 재즈를 연주하듯 펼쳐가고 있다.
한국팀이 어떻게 나올지는 그날이 오기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강팀이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