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월드컵 결산] (서영채의 '월드컵제언') 'K리그서 만나자'

기쁘고 행복했던 한달이었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내가 얻은 기쁨과 행복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축구에 관한 한 그동안 나는 집안에서 고립된 존재였다. 축구 경기가 열릴 때면 딸아이와 채널 다툼을 해야 했고, 평소에도 축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드라마주의자 아내와 드라마를 보지 않는 나는 축구와 드라마를 둘러싸고 누가 서로를 더 경멸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암투를 벌이곤 했었다. 또 두 여자를 설득해서 간신히 K리그를 보기 위해 집에서 가까운 수원 경기장에 갔을 때에도 경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상황은 1백80도로 바뀌었다. 축구경기에 심드렁했던 아내도 딸도 이제는 안정환의 외모가 아니라 안정환의 플레이와 컨디션에 대해, 부상 때문에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한 고종수의 불운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빠르고 날렵한 송종국과 여드름 투성이 박지성의 플레이를 사랑하게 되었고, 혼자만 경기장에 간다고 투덜거리기까지 할 정도가 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평소에는 전화를 해도 안부 인사 말고는 맹숭맹숭할 정도로 말이 없던 아버지와 신나게 축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거리로 나가자는 가족들의 성화를 달래는 것은 그 전에 축구장에 가자고 설득하는 것보다 더 힘들 지경이 되었다. 집 밖에서도 어딜 가나 축구 얘기였다. 발로 넣은 골도 헤드트릭에 포함되느냐는 여자 동료의 질문이나, 방송에 나오는 '옵사이드"라는 말과 신문에 등장하는 '오프 사이드'라는 말의 차이를 몰라 고민했었다는 고백은 모두를 즐겁게 할 폭소감이었다. 그렇게 아줌마 군단이 새로운 축구팬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도 기쁜 일이고, 구대회에서 언제나 하위권을 맴도는 우리 동네 조기축구단에 매주 새로운 회원들이 들어오고 있는 것도 기쁜 일이고, 언제나 한국팀의 승리에 돈을 걸어 대책없는 낙관주의자 소리만 듣던 내 친구가 이번에는 그동안 월드컵에서 잃어왔던 금액을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일확천금을 했다는 것도 기쁜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기쁨은 월드컵이라는 진짜 무대에서 우리 선수들의 경기를 무려 일곱 게임이나 보았다는 것이다. 또한 지난 10여년간 월드컵 게임을 볼 때마다 뇌까리곤 했던, 다시는 대표팀 경기를 보지 않겠다는 말을 앞으로는 절대로 하지 않을 확신이 생겼다는 것도 큰 기쁨이다. 문제는 승패가 아니라 수준임을, 열정 없이는 어떤 재능도 존재할 수 없음을 그들은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 순수한 열정이 만들어낸 열린 공간이 있었기에 불순한 정치적 의도나 엄숙주의 속에 갇혀 있었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태극기도 시민들의 광장으로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이제 축제는 끝났고 우리는 다시 일상의 리듬으로 복귀할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불어넣어준 넘치는 활기와 에너지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경험한 순수한 열정의 아름다움과 감동을, 척박한 현실 속에서 그들이 일깨워준 희망의 메시지를 우리는 오래도록 간직할 것이다. K리그에서 다시 만나자는 붉은 악마들의 초대장을 이제는 내 아내와 딸도 기꺼운 마음으로 접수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기쁨과 행복을 함께 나눈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