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발칙한 편견 .. 이향희 <방송작가>

이향희 이번에 조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조카에게 담임선생님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묻고,젊은 선생님인지 연세가 있어 보이는지를 물었다. 조카 왈,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결혼은 한 거 같더라는 거다. 그래서 니가 결혼했는지 안했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다시 왈,손에 반지를 꼈고,립스틱을 발랐다는 거다. 그래서 반지는 그렇다치고,립스틱을 바르면 결혼한 거냐고 다시 물었다. 그랬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여자들은 남편의 도움을 받아서 립스틱을 바르잖아?"하는 거다. 다시 물었다. "고모는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립스틱을 바르잖아?" 잠시 나를 보더니 "고모는 히딩크 감독님의 도움을 얻어서 립스틱을 바르잖아"라는 거다. 내가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감독님이라는 호칭을 쓴 것을 들은 조카는 세상천지에 감독님이라면 히딩크 감독님밖에 없는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일곱 살 남자아이의 눈에는 여자가 립스틱을 바르는 것은 남편이든 감독님이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발칙한 상상이 정말 기가 막혔다. 일상의 드라마는 이 발칙한 편견에서 출발한다. 같이 밥만 먹으면 제일 늦게 구두끈을 매던 어떤 사람,알고 보니 푼돈을 모아 해마다 거금의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내고 있었고,동네를 돌며 신문지를 줍는 초라해 보이는 저 할머니,알고 보니 아파트를 두 채나 갖고 계신데,심심해서 신문지를 줍는 일을 하고 계신단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는 TV 드라마도 당연히 이런 일상의 발칙한 편견에서 출발한다. 그리곤 이 발칙한 편견에서 어떻게 벗어나는가 하는 과정이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펼쳐진다. 가끔은,현실에서는 절대 벗어날 수 없는 편견이 있다면,제발 그런 편견은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드라마에서만큼은 꿈을 이루어주기도 한다. 서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가끔은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여 저기 더 멀리까지 끝도 없이 가기도 하지만,봄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편견이 있기에 그리고 그 편견을 벗어버리는 맛이 있기에 일상이 아름다운 것이라고,언젠가 나의 사랑스러운 조카가 여자가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립스틱을 바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기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