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半전세 半월세' 노후대책..姜萬洙 <디지털경제硏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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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그 때도 강남의 아파트 값이 올라 야단일 때 친구와 부부동반으로 저녁식사를 하게 됐는데 친구 부부가 나를 보고 진반농반(眞半弄半)으로 최고의 노후대책을 해 놓았다면서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던 일이 있었다.
얘기인즉 그 친구는 송파에 있는 아파트에 살다가 부인의 말을 따라 골프장이 창 너머 보이며 경치 좋고 평수도 큰 서울 근교의 호젓한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는데, 이사 간 얼마 후 옛날 살던 아파트 값이 크게 올랐다는 것이다.
한편 아름다운 경치도 하루 이틀이지 불편한 게 하도 많아 다시 돌아 갈까하여 아파트를 팔려고 내놓았는데 값은 고하간에 팔리지가 않아 낭패라는 것이었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좋은 학원이 많은 동네라고 물건이 없어 못 살 지경으로 올랐는데 전·월세도 덩달아 크게 올랐다.
'반은 전세로' 놓고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교외의 큰 아파트를 하나 사고, '반은 월세로' 놓으면 생활비가 너끈히 나온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저금리시대에 최고의 노후대책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이제 지금 아파트를 팔아 옛날 아파트로도 돌아올 수 없게 됐으니 "노후가 걱정된다"는 얘기였다.
듣고 보니 그럴싸한 얘기였으나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주변머리 없이 주저앉아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내가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 오기까지는 수많은 낙첨과 시행착오 끝에 찾아온 행운 때문이었다.
처음 공개분양을 시작한 반포아파트부터 시작해 운도 없었지만 10년 넘게 투기꾼과 싸우느라 내리 낙첨만 하였다.
애도 둘이나 되고 아무래도 당첨 가능성은 없어 보여 '투기꾼'에게 프리미엄 주고 그때로는 변두리에 조그만 아파트를 마련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애들 데리고 서울 주변의 이산 저산을 올라 어설프게 주워들은 지리풍수설에 따라 지세를 보면서 어디에 자리 잡고 살아야 좋을까 하고 몇 년을 찾아 다녔다.
어느 추운 겨울 아내와 애들과 함께 서울의 남쪽 끝 대모산에 올라 아래를 살펴보니 앞에는 양재천이 흐르고 뒤로는 구릉을 지고 있는 땅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길지라 생각돼 그곳에 터를 잡기로 정했다.
그 동네 아파트 분양을 기다렸다가 신청했는데 10년 만에 일생에 처음이자 한번 뿐일 당첨이라는 운이 내게 오게 된 것이다.
어느 해 투기억제정책이 풀렸을 때 강남의 아파트 값이 크게 오르자 많은 이웃 사람들이 재빠르게 팔고는 평수를 늘려 분당으로 빌라로 떠났다.
나는 일에 파묻혀 겨를이 없었고 애들 학교도 옮길 수 없어 그 동네 아파트 '원주민'으로 이사 가서 지금까지 20년이나 눌러 살게 됐는데 그동안 아파트 값도 20배나 올랐다.
우리 계단에는 우리 집 말고 두 집만 '원주민'이다.
주변머리 없이 깔고 앉아 있다보니 최고의 노후대책을 하였노라는 칭찬까지 들었으니 허허 참이다.
이번에 다시 투기열풍이 불자 정부는 우리 동네에 뭇매를 쳤다.
언제나 같이 투기꾼은 이번에도 날쌔게 도망가 버리고 주변머리 없는 민초들만 죄도 없이 뭇매를 맞게 됐다.
몇 년 전에는 부동산 경기를 부양한다고 멀쩡한 아파트를 20층 넘게 재건축을 허용하고,주거지 한 가운데 40층짜리를 허가하더니,이번에는 그 이웃인데도 12층만 재건축하도록 해서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만들고 있으니 무슨 도깨비장난인지.투기열풍이 불 때마다 투기꾼들이 도깨비놀음을 하고 간 다음 그 땅에 풀같이 뿌리 내리고 사는 민초들은 언제나 당한다.
이번에도 주변머리 없는 '원주민'들은 세금벼락을 맞게 돼 떠나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눌러 앉아도 당하고 도망가도 당하니 어찌 할까.
정말로 이렇게 말고는 할 수 없는 것인지."재수 있는 놈 연못에 빠져 붕어 잡아 나온다"는 말이 있다.
어차피 인생살이란 그런 것이겠지만 지금 같은 세상에 재수타령만 하기에는 너무 허전하다.
재수를 골고루 줄 수 있는 사람 누구 없을까.
재수 따라 가는 '반전세 반월세' 같은 노후대책이 아니라 '재수 없는 놈들'도 붕어 잡는 노후대책 마련할 사람은 누굴까.
20년 전 재수를 감사하면서도 '재수 없는 친구'에게 죄도 없이 미안하기도 하다.
mskang36@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