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수출영웅] 홍완기 <(주)HJC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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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또 떨어졌습니다."
나는 낙담하여 수화기를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뭐? 또 떨어져? 이유가 뭐야?"
"글쎄, 그 사람들이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합격할 때까지는 우리나라에 들어올 생각하지마!"
수화기를 끊고 나니 화가 더 치밀었다.
우리 제품이 그 정도 밖에 안 된단 말인가.
정말 세계의 벽은 높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1983년, 홍진크라운은 미국 시장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우연한 기회에 '서울헬멧'이라는 회사를 인수하여 '홍진기업'이라는 상호로 헬멧 사업을 시작한지 11년.
각고의 노력으로 6년 만에 국내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자 세계시장에 도전해 보자는 생각에 진작부터 미국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시장 진출은 쉬운게 아니었다.
우선 미국 연방교통부(DOT:U.S.Department of Transportation)가 주관하는 품질규격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게 여간 까다로운게 아니었다.
미국에 지사를 설립하고 동생 수기에게 지사장을 맡겼다.
그 때부터 각종 우수한 샘플을 구입해 연구하고, 품질을 개선하며 DOT 규격을 따내는 일에 전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해서 샘플을 보내면 규격획득에 실패하고 반송되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정말 울화통이 터질 일이었다.
나는 화가 가라앉자 다시 미국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무턱대고 테스트에 응하지 말고 마당이라도 쓸어."
미국의 시험관이 사는 곳은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었다.
나의 닦달에 자극을 받은 지사장은 어느날 아침부턴가 시험관 집앞의 눈을 쓸기 시작했다.
그렇게 눈을 쓸기 한달 여.
마침내 시험관이 지사장을 불렀다.
"눈을 쓴다고 하자가 있는 제품을 합격시킬 수는 없소. 눈 쓰는 일을 중단해 주시오."
"합격시켜 달라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왜 떨어지는지만 가르쳐 주십시오."
지사장은 애원하며 사정했다.
그랬더니 담당관은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몇 가지 불합격 사유를 가르쳐 주었다.
"댕큐! 미스터 데이빗. 곧 새로운 샘플을 만들어 제출하겠습니다."
미국지사장이 알아낸 정보는 곧바로 샘플제작에 반영되었다.
그러기를 더 몇 차례.
홍진 크라운 헬멧은 마침내 1984년 11월 미국 DOT 규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
무려 2년여가 걸린 험난한 랠리였다.
그러나 품질규격을 통과했다고 해서 금방 제품이 팔려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샘플을 들고 다닐 때마다 헬멧의 디자인과 기술이 뒤떨어져 바이어들의 비웃음도 많이 샀다.
아시아에서 온 저급품이라는 냉대가 계속됐다.
"내친김에 스넬까지 획득하자."
스넬(Snell)이란 오토바이 경기도중 헬멧이 깨져 사망한 스넬이라는 미국 선수를 추모하기 위하여 '스넬기념재단'이 만든 미국 최고의 헬멧 품질보증서다.
따라서 스넬규격은 DOT 규격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까다로웠고 고급브랜드의 대명사였다.
홍진 크라운은 계속해서 품질을 개선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1987년 스넬규격도 따냈다.
이어서 유럽의 각종 규격도 획득했다.
홍진 크라운이 스넬규격을 획득하자 미국 시장에서 제품에 대한 인지도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매출이 급격하게 늘지는 않았지만 바이어들이 호감을 나타냈다.
그러자 미국 헬멧 판매상중 가장 큰 업체인 '로키 사이클'의 빅터 영 사장이 급히 한국으로 날아왔다.
그는 우리 회사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다.
미국 시장 개척시 맨 먼저 두드린 곳이 바로 로키 사이클이었던 것이다.
그 때 로키 사이클은 아시아의 작은 업체를 문전박대하며 제대로 상담도 해주지 않았다.
"홍 사장, 50만달러를 주겠소. 그럴테니 우리 상표를 붙여주시오."
빅터 영 사장은 그 때의 일을 사과하며 제안했다.
한번에 50만달러 어치를 수입할 테니 자신들의 상표 '스파르탄(Spartan)'을 부착하여 OEM으로 제작해 달라는 것이었다.
50만달러.당시의 우리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 돈이 있으면 새로운 기술개발비에 투자할 수 있고 단숨에 미국 시장에서 자리잡을 수 있는 탐나는 뭉칫돈이었다.
나는 그의 제안을 받고 이틀 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노(NO).
곶감은 달다.
그러나 하나씩 빼먹고 나면 남는 것은 막대기뿐이다.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방식)으로 납품을 하는 것은 곶감과 같다.
자사 브랜드가 없고, 자체 판매망을 갖추지 않으면 계속해서 끌려 다닐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처음에는 어렵더라도 반드시 우리 브랜드로 런칭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빅터 영은 "후회할 것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말을 남기고 소득 없이 떠났다.
자사브랜드는 처음에 정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광고와 선전, 새로운 디자인과 품질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소비자에게 브랜드가 알려지면 신발이나 의류처럼 값이 안 맞는다고 다른 곳으로 거래처를 바꿀 수 없다.
처음에 우리 회사의 저력을 내다보지 못하고 문전박대했던 로키 사이클사는 땅을 치고 후회했다 한다.
나중에 후회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빅터 영 사장 그였던 것이다.
그는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당시 자신의 결정이 자기 비즈니스 생애의 가장 후회스러운 결정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전해들었다.
그 때부터 공을 들여 키운 HJC 브랜드는 현재 세계 최고가 되었다.
이제는 세계 어느 곳에 가더라도 우리 브랜드가 헬멧 매장 한가운데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HJC는 1992년 이래 미국 시장에서 시장점유율 50%에 육박하며 10년 넘게 1위를 지키고 있다.
세계 전체시장에서도 16.5%를 기록,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다.
2위인 이탈리아 NOLAN의 점유율이 우리의 절반수준인 7%대임을 감안하면 압도적인 우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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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완기 회장 약력 ]
40년 충남 논산군 광석면 출생
68년 한양대 공업경영학과졸
71년 홍진기업 창업
82년 (주)홍진크라운으로 법인명 변경
86년 전국오토바이부품진흥회 회장
89년 서울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 수료
2002년 세종대 명예경영학박사
2003년 (주)HJC로 상호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