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책 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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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으로 유명한 김승옥씨의 단편 '싸게 사들이기'의 배경은 헌 책방이다.
주인공은 중고서점에서 필요한 책을 찾아 주인 몰래 몇 장 찢어낸 다음 며칠 뒤 다시 가서 파손된 걸 빌미로 싸게 산다.대학생이라고 해봤자 새책은커녕 헌책도 제값 주고 사기 힘들던 1960년대의 단면이다.
그로부터 40년 뒤.헌 책방과 동네 서점 대신 도심 군데군데 자리잡은 대형서점들이 첨단 '디지털 책도둑'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소식이다.
가뜩이나 책이 안팔려 죽을 지경인데 디지털카메라나 카메라폰으로 책 내용을 통째 찍어가는 얌체족이 늘어나 진열대 앞에 '촬영 금지' 팻말까지 붙였다는 것이다.봐야 할 책은 사야 하고 손때가 묻은 책은 좀체 버리지 못하는 나이든 세대와 달리 요즘 대학생들은 필수과목 교재도 사지 않거나 샀어도 학기만 끝나면 내다판다.
디지털 책도둑 역시 건축 디자인 컴퓨터 관련서 같은 비싼 책이 주대상이고,불황 탓에 돈을 아끼려는 데서 비롯됐다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도 한다.
리포트 및 논문에 쓸 내용이나 도표의 경우 찍어서 그대로 갖다 붙이면 손으로 작성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거나 비싼 전문서적도 정작 참고로 할 만한 내용은 얼마 안돼 사기 아깝다는 게 그것이다.그렇다고 해도 책을 공짜로 읽고 손으로 베끼는 것도 모자라 카메라로 몽땅 찍어간다는 데는 할말을 찾기 어렵다.
아무리 큰 서점도 책이 안팔리면 버티기 힘들다.
출판사 역시 마찬가지다.안그래도 넘쳐나는 영상물과 인터넷 정보에 경기까지 나빠 전 같으면 기본 부수는 나갈 좋은 책도 꿈쩍 안하는 바람에 출판사마다 출간기획을 못한다는 마당이다.
그러나 책이야말로 터널과 늪을 지나게 하는 힘이다.
구경하고 놀러다니는 것도 좋지만 책을 통해 깨우치는 건 다른 무엇으로도 얻기 어렵다.
뭐든 그렇지만 책은 특히 돈 주고 사야 열심히 본다.
인터넷서점이 편리하다지만 서점에서 이책 저책 둘러보는 뿌듯함에 비할 순 없다.
디카와 폰카를 지닐 정도면 형편이 어려워 책을 못산다고 하긴 힘들 것이다.돈 탓이건 편리함 때문이건 책 내용을 몰래 찍어가는 것은 양심을 저버린 도둑질에 다름 아니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
주인공은 중고서점에서 필요한 책을 찾아 주인 몰래 몇 장 찢어낸 다음 며칠 뒤 다시 가서 파손된 걸 빌미로 싸게 산다.대학생이라고 해봤자 새책은커녕 헌책도 제값 주고 사기 힘들던 1960년대의 단면이다.
그로부터 40년 뒤.헌 책방과 동네 서점 대신 도심 군데군데 자리잡은 대형서점들이 첨단 '디지털 책도둑'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소식이다.
가뜩이나 책이 안팔려 죽을 지경인데 디지털카메라나 카메라폰으로 책 내용을 통째 찍어가는 얌체족이 늘어나 진열대 앞에 '촬영 금지' 팻말까지 붙였다는 것이다.봐야 할 책은 사야 하고 손때가 묻은 책은 좀체 버리지 못하는 나이든 세대와 달리 요즘 대학생들은 필수과목 교재도 사지 않거나 샀어도 학기만 끝나면 내다판다.
디지털 책도둑 역시 건축 디자인 컴퓨터 관련서 같은 비싼 책이 주대상이고,불황 탓에 돈을 아끼려는 데서 비롯됐다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도 한다.
리포트 및 논문에 쓸 내용이나 도표의 경우 찍어서 그대로 갖다 붙이면 손으로 작성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거나 비싼 전문서적도 정작 참고로 할 만한 내용은 얼마 안돼 사기 아깝다는 게 그것이다.그렇다고 해도 책을 공짜로 읽고 손으로 베끼는 것도 모자라 카메라로 몽땅 찍어간다는 데는 할말을 찾기 어렵다.
아무리 큰 서점도 책이 안팔리면 버티기 힘들다.
출판사 역시 마찬가지다.안그래도 넘쳐나는 영상물과 인터넷 정보에 경기까지 나빠 전 같으면 기본 부수는 나갈 좋은 책도 꿈쩍 안하는 바람에 출판사마다 출간기획을 못한다는 마당이다.
그러나 책이야말로 터널과 늪을 지나게 하는 힘이다.
구경하고 놀러다니는 것도 좋지만 책을 통해 깨우치는 건 다른 무엇으로도 얻기 어렵다.
뭐든 그렇지만 책은 특히 돈 주고 사야 열심히 본다.
인터넷서점이 편리하다지만 서점에서 이책 저책 둘러보는 뿌듯함에 비할 순 없다.
디카와 폰카를 지닐 정도면 형편이 어려워 책을 못산다고 하긴 힘들 것이다.돈 탓이건 편리함 때문이건 책 내용을 몰래 찍어가는 것은 양심을 저버린 도둑질에 다름 아니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