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설의 '경영 업그레이드'] 모든 가게는 벤처다

며칠 전 오후였다.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며 찬바람이 불었다. 계란 넣은 쌍화차가 마시고 싶어졌다. 같이 걷던 사람과 한참동안 '옛날식 다방'을 찾아다녔다. 다방이라는 이름이 붙은 허름한 간판을 발견해 가까이 가보면 예외없이 누런 종이가 붙어있었다. '점포 세놓음' 아니면 '폐업,수리중'.다방뿐만이 아니었다. 분식집 삼겹살집 사진관 이발소 구멍가게….목이 안좋고 규모가 작은 가게들은 너나없이 망해가고 있었다. 겨울이 덜 힘든 것은 꽃피는 봄이 기다리고 있어서다. 그러나 고생스런 한해를 보낸 우리는 더 고통스런 내년을 맞을지 모른다. 새해가 올해보다 나을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3%대 경제성장을 점치는 전망이 늘어가고 장기불황의 서곡으로 해석하는 연구기관도 적지 않다. 소비 부진,설비투자 위축,부동산 침체,환율 하락 등 각 부문을 떼놓고 봐도 부정적인 단어가 안붙은 게 없다. 지난 90년대 말 경제위기 때도 희망은 많았다. 금융위기라는 외부적 요인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진 만큼 금융시스템만 안정되면 나아질 것이란 기대가 컸다. 그러나 지금의 침체는 질이 다르다. 무엇보다 경제주체들이 일할 맛과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는 게 문제다. 좀 거창하게 얘기하면 기업가 정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사실 우리는 기업가 정신을 장려하는 전통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60년대 이후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것도 정부의 공으로 보는 시각이 더 많다. 오히려 기업가들을 개발연대의 수혜자,기득권자로 낮추는 시각이 고착화돼있다. 수년 전 벤처붐 때 젊은 기업가들에 대한 장려 분위기가 잠시 형성되기도 했지만 거품이 꺼진 지금은 벤처기업인 하면 '겉과 말만 화려한 사기꾼' 정도로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중소기업인에 대한 이미지 역시 개선되지 않고 있다. 기술 개발보다는 땅투기에,고용창출보다는 외국인 근로자 착취에 혈안이 된 집단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대기업에 대한 규제가 오히려 강화되고 담보 없는 중소기업에 대해선 대출에 소극적인 관행이 남아있는 것은 어쩌면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이런 편견이 여전해서인지 모른다. 이런 풍토에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세계적인 초우량기업이 나온 것은 행운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사실 기업가 정신이란 별 게 아니다. 뭔가 돈 될 것이 보이면 남들이 말려도 회사를 차리고 최선을 다해 돈을 벌려는 태도 이런 것이 바로 기업가 정신이다. 큰 기업들에만 기업가가 있는 게 아니다. 길거리에 있는 간판들을 보라.식당 찜질방 미장원 오락실 학원 헬스클럽 수리점 구두방 주유소 야채가게 당구장 호프집….이 수많은 가게는 기업이 아니고 무엇인가. 잘 될 것이란 희망 하나,그리고 열심히 하면 망하지는 않으리란 기대 하나를 갖고 때론 전재산을 털어 시작한 벤처다. 먹고 살기 위해,큰 돈을 벌기 위해 빚까지 얻어 가게를 얻고 온집안이 매달려 일한다는 점에서 모든 가게는 벤처다. 어려울 때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것은 바로 과거보다는 미래에 투자하는 기업가 정신이다. 그 정신에 희망을 걸어야 할 시점에 오히려 한국의 기업가 정신이 죽어가고 있다. 하루평균 1백90개,올 한해만 10만개의 음식점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다. 회사가 죽고,가게가 망하고,간판은 내려지고 있다. 간판 하나하나에 담긴 구멍가게 벤처기업인의 한 서린 꿈까지 걷히고 있다. 원망할 그 누구가 분명치 않으니 이 억울함을 어찌할까. 2004년 한국의 겨울 풍경은 이렇게 우울하다. 한경 가치혁신연구소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