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院산책] (21) 대원사 동국제일선원


오후 1시,선방에서 나온 수좌들이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선방의 규율과 기강을 세우는 입승(立繩) 소임자가 장군죽비(참선 도중에 조는 사람을 경책하는 큰 죽비)를 어깨에 둘러맨 채 앞장을 서자,수좌들이 하나둘 뒤를 따른다.
참선 도중 굳어진 다리를 풀기 위한 포행(산책)이다.


수좌들은 대부분 모자와 마스크,목도리로 머리와 얼굴을 감쌌다.


며칠째 계속된 강추위 끝에 날이 제법 풀렸지만 바람이 가세한 산중의 날씨는 여전히 매서운 탓이다.
그러나 날씨보다 더 매서운 건 수좌들의 눈빛이다.


모자와 마스크 사이로 간신히 보이는 눈에는 "이 한 철 공부로 도과(道果)를 이루고 말겠다"는 결의가 가득하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 있는 비구니 참선도량인 경남 산청의 대원사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신라 진흥왕 9년(548년) 연기대사가 창건한 1천5백년 고찰에 수행열기가 뜨겁다.
음력 12월 초하루부터 용맹정진에 들어간지 6일째.하루 24시간 잠을 자지 않고 눕지도 않은 채 지내온 사람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걸음이 당차다.


보폭이 넓고 걷는 속도가 빨라서 긴장감마저 감돈다.


더구나 음력 11월 한달간 새벽 3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12시간 이상 가행정진을 해온 터라 힘에 부칠 만도 하지만,그런 기색은 전혀 없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성도재일(음력 12월8일)을 맞아 부처님처럼 견성오도(見性悟道)하겠다는 각오로 용맹정진을 합니다.


혼침(昏沈·정신이 흐려짐)과 수마(睡魔·졸음),망상으로 인해 힘은 들지만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나면 자신감이 생기고 애쓴 것만큼 발전이 있지요."


대원사 총무 묘명 스님의 설명이다.


하지만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다는 게 쉽지는 않을 터.묘명 스님은 "(용맹정진을) 혼자서는 못해도 대중의 힘으로 한다"고 얘기한다.


실제로 이번 용맹정진 기간에 일흔이 넘은 선덕(禪德·공부의 경지가 높고 경력이 오랜 수행자) 한 사람으로 인해 전체 대중이 다시 정진의 자세를 가다듬었다고 한다.


용맹정진 중이기는 하지만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는 앉아서 졸더라도 죽비경책을 하지 않으려 했으나 선덕이 입승에게 "내가 졸면 죽비를 쳐달라"고 주문했던 것.선덕의 솔선수범과 무언의 경책으로 인해 수좌들은 더욱 치열하게 정진하게 됐다는 얘기다.


대원사가 수덕사 견성암,울주 석남사 등과 함께 대표적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자리잡은 것은 지난 57년 비구니선원을 개원하면서부터다.


이전에도 선방은 있었지만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 공비 소탕을 명목으로 불을 질러 선방 앞의 탑만 남은 채 사찰이 전소되면서 맥이 끊겼다.


폐허로 변한 절터에 비구니 법일 스님(91년 입적)이 지난 55년부터 상좌들과 함께 대원사를 중창하고 그 첫번째 불사로 사리전(舍利殿)선원을 신축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5∼6명가량 수행하는 조그만 선방이 있었는데,선방을 중창하면서 커졌어요.


그땐 불사를 하면서도 정진을 쉬지 않았지요.


처음부터 내가 입승을 봤는데,대중들이 30여명씩 모여들어 이젠 자리를 잡았지요."


법일 스님의 맏상좌인 선원장 성우(性牛·83) 스님의 설명이다.


대원사는 자연경관이 뛰어난 데다 선원이 사찰 방문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떨어져 있어서 공부하기에 좋은 장소로 꼽힌다.


관광 사찰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 관람료를 받지 않을 정도로 사찰측은 수행환경 보호에 역점을 둔다.


이 때문에 안거 때마다 방부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특히 지난 86년 선원을 크게 중창한 뒤로는 철마다 40여명이 모여드는 수행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대원사 동국제일선원은 선원 앞에 진신사리를 모신 다층석탑(보물 제1112호)이 있는 점이 이채롭다.


이 때문에 선방 건물을 '사리전' 또는 탑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리전은 정면 7칸,측면 3칸으로 60여평 남짓한 규모.30명 정도면 수행하기에 알맞지만 항상 정원 초과다.


이번 동안거에 참여한 납자는 36명.지난해 하안거 땐 45명이나 정진했다.


대원사 탑전은 성철 스님이 출가하기 전 수행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삶의 근원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품었던 청년 이영주(성철 스님의 속명)는 1935년 어떤 스님이 전해준 영가 대사의 '증도가'와 승찬 스님의 '신심명'을 읽은 뒤 대원사를 찾았다.


스님들만 수행하는 탑전 선방에서 '무(無)'자 화두를 들고 가행정진에 들어간 지 42일.청년 이영주는 앉으나 서나,오나 가나,말할 때에나 그렇지 않을 때에나 늘 한결같은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지를 이뤘고 훗날 확철대오의 기초를 여기서 닦았다고 한다.


총무 묘명 스님은 "성철 스님은 대원사를 늘 그리워하고 좋아하셨고,대원사 스님들이 해인사로 찾아가면 항상 각별한 관심을 갖고 대해 주셨다"고 회고한다.


지금 탑전의 제일 큰 어른은 선원장 성우 스님이다.


성우 스님은 무릎 관절이 아파서 거동이 불편하지만 정신은 또렷하다.


스스로 "몸은 늙어 폐물이라도 정신은 살아 있고,생각은 젊은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강조한다.


"불법(佛法)은 각자 자기 마음을 깨닫는 것이라 아무리 좋아도 안 배우면 몰라요.


그러니 각자 자기 살림을 온전히 잘 하는 게 중요하지요.


부처님의 48년간 법문을 한마디로 하면 '너,바로 깨달아라' 하는 겁니다.


세상살이는 잠깐이요 물거품 같은 것인데 사람들은 영원할 줄 알아요.


(쓰나미 같은) 지진·해일이 올 줄도 모르고 바닷가에서 조개 주우며 노는 게 우리 인생인 데 말입니다."


선원 앞의 다층탑이 돌 속의 철분이 산화되면서 벌겋게 물들었다.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을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는 무엇일까.


산청=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