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문서맹

거리에서 길을 묻는 외국인들을 보면 십중팔구 지도를 들고 있다. 난생 처음 해외에 가면서도 지도를 챙기는 법이 거의 없는 우리와는 영 딴판인 셈이다. 우리는 국내에서도 낯선 곳에 갈 때 지도를 참고하기보다 그저 주위에 물어보고, 모임장소를 알려주는 약도를 받아도 그걸로 찾아가지 않고 전화로 어디인지 알아낸 다음 출발하기 일쑤다. 잘 들여다보지 않는 게 지도뿐이랴. 냉장고 에어컨은 물론 컴퓨터나 휴대폰같은 첨단 제품을 사고서도 사용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는다. 젊은층은 좀 나은지 몰라도 나이든 사람들에겐 제아무리 상세한 설명서도 무용지물인 수가 허다하다. 자연히 최소한의 용도와 사용법 외엔 알지 못하고 조금만 이상해도 무조건 애프터서비스부터 신청한다. 첨부된 문서의 내용만 잘 파악하고 익히면 보다 많은 기능을 활용하고, 혼자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는 것이다. 첨부된 내용을 살피지 않는 건 약이나 화장품도 마찬가지다. 성분과 용법을 무시한 채 약국이나 가게에서 주는 대로 먹고 바른다. 광고나 외양 의존도가 높은 것도 이같은 태도와 무관하기 어렵다. 한국인의 문서해독력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중 최하위권이라는 소식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실시한 성인 문서해독력 조사(IALS) 결과 75% 이상이 새 직업에 필요한 내용을 배우기 힘들 만큼 일상문서 해독력이 형편없었다는 것이다.특히 지도 약품설명서 등을 알아보는 문서 문해는 꼴찌를 겨우 면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문서맹’인 셈이다. 원인은 많아 보인다. 그동안엔 새로 익힐 기술이 많지 않았던데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는 일이 가능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실제 회사에선 중간간부만 돼도 아랫사람에게 시키곤 해 복사나 팩스 전송도 못하는 일이 숱하다. 약도나 설명서 등이 도통 어떻게 되는 건지 알수 없을 만큼 요령부득으로 만들어진 것도 문서맹 국가를 만든 데 한몫 한 듯하다. 문서 해독력은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핵심역량이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더이상 남의 손을 빌릴 수는 없다. 정보 홍수시대의 경쟁력인 문서해독력을 기르자면 내용을 파악하고 그것이 어떻게 응용되는지 알 수 있어야 한다. 전공이 뭐든 읽고 이해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국어교육은 제대로 받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