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가계대출 규모 사상 첫 기업대출 추월
입력
수정
은행의 가계대출 규모가 사상 처음으로 기업 대출액을 추월했다.
최근 수년간 은행들이 리스크(위험)가 큰 기업 대출을 외면한 채 안전한 주택담보 대출 등 가계 대출에만 몰두해 온 결과다.
때문에 일각에선 '가계대출 쏠림 현상'으로 인해 은행이 '예금의 생산자금화'라는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경기회복 부진이 장기화되면서 기업들의 대출 수요 자체가 위축된 결과라는 게 은행들의 설명이다.
대기업들은 이미 주식 시장 등 직접 금융시장으로 눈을 돌린 지 오래이고 쓸 만한 중소기업들은 경기 침체로 투자를 기피해 은행 돈 쓰겠다는 회사가 줄고 있다는 것.어쨌든 가계 대출의 기업대출 초과 현상은 당분간 지속돼 그에 따른 논란도 끊이지 않을 예상이다.
◆역전된 가계·기업대출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현재 예금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293조3777억원(말잔 기준)에 달해 기업대출 잔액 287조6445억원보다 5조7332억원 많았다.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이 기업대출 잔액을 추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외환위기 이전인 1996년 은행의 기업대출 잔액은 124조원으로 가계대출 잔액(51조원)의 약 2.5배에 달했다.
1999년까지도 기업 대출은 가계 대출의 2배 이상을 유지했다.
그러나 2000년 가계대출 잔액이 110조9108억원으로 사상 처음 100조원을 넘어선 이후 가파르게 늘면서 기업 대출과의 간격을 계속 좁혀왔다.
특히 올 들어 부동산 시장 과열로 은행들이 주택담보 대출에 '다걸기(올인)'하면서 지난 상반기에만 가계대출 증가액은 기업대출 증가액(5조7130억원)의 3배 가까이 웃도는 15조6727억원에 달해 결국 역전 현상이 빚어졌다.
◆은행은 가계 상대 '돈놀이'만
가계대출이 기업대출 잔액을 초과한 것의 1차적 원인은 은행들의 가계대출 집중에서 찾을 수 있다.
1998년 전후 외환위기 때 기업들의 연쇄 부도로 큰 곤욕을 치렀던 은행들은 이후 기업 대출보다는 가계 대출에 치중해온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가계 대출은 상대적으로 기업 대출보다 안전하다는 판단에서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은행들이 기업 대출은 기피한 채 부실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주택담보 대출을 중심으로 가계대출 확대 경쟁을 벌여왔다"며 "은행들의 그 같은 안이한 영업행태로 인해 기업 대출이 위축됐고 신용카드를 중심으로 한 가계대출 증가는 신용불량자 양산 등 부작용을 낳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은행들이 기업 대출을 통한 생산자금 지원보다는 가계를 상대로 한 '돈놀이'에만 몰두한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한은 관계자는 "은행 대출금이 기업 투자에 사용되지 않고 가계 쪽으로만 흘러들어갈 경우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더 약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대출 수요도 줄어
기업대출 기피에 대한 비판에 은행들은 억울해한다.
기업 대출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은 은행 돈을 필요로 하는 기업들이 그만큼 감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주장이다.
은행 관계자는 "신용도 높은 대기업들은 자체 신용으로 직접금융 시장에서 스스로 돈을 조달해 은행을 찾지 않은 지 오래됐다"며 "여전히 은행 대출을 원하는 중소기업은 대부분 신용상태가 불량한 영세 기업들뿐이고 은행이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우량 중소기업은 극히 한정돼 있는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한은 관계자는 "은행들 스스로 리스크가 큰 영세 중소기업 대출에 적극 나설 가능성이 적은 데다 우량 기업들도 당장 투자에 나서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여 가계대출 우위 현상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차병석·유병연 기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