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눈물 닦아주는 정치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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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종
새해 벽두부터 정치가 격랑에 휩싸이고 있다.
한국정치가 희망을 준 적이 거의 없으니 우울한 병술년의 시작이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지만,아무래도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느낌이다.
야당이 사학법 때문에 장외투쟁을 한다고 해서 여당단독으로 예산안과 종합부동산세법 등을 처리한 것은 정치도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여당으로서는 이참에 한나라당 없이도 나라가 잘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특히 열린우리당은 그동안 일부 지지자들로부터 축구에 빗대어 문전처리가 미숙해 골을 넣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던 만큼,이 기회에 '나보란 듯이' 능숙하게 골을 넣을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하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한나라당이라는 골키퍼가 없는 사이 예산안 등 무려 20여개의 골을 넣지 않았던가.
그러나 착각은 자유다.
그 20여개의 골이 '자살골'이 되고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또 한국정치가 아무리 3류정치로서 여야가 항상 엇박자속에 티격태격한다고는 하나,정치나 국정은 야당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보고 하는 것이다.
98%를 위해 2%의 국민은 적대시하겠다는 정부ㆍ여당의 논리나 기회만 있으면 강남 등을 기득권 세력으로 폄훼하는 정치적 언사가 모두 정치권력의 정도에 어긋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에 일곱 난쟁이들의 다툼을 연상시키는 권력투쟁과 전략전술의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그렇다고 정치가 이기는 맛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오기로 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선거라면 다르다.
선거에서는 이기지 않으면 지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생활에 막중한 영향을 미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게 선거와 같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반드시 이겨보겠다는 것,이 기회에 야당에 쓴맛을 보이고 버릇을 가르쳐 보겠다는 것,그것이 정부ㆍ여당의 국정목표가 됐다면 유감이다.
그보다는 갈등을 풀고 얽힌 실타래를 풀어가고자 노력하는 모습,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이유있는 반론을 이해하고 보듬어보려는 여유와 아량,그것이야말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닐까.
그래야만 '소갈머리'가 있는 정치가 되는 것이지,그렇지 않으면 '주변머리'도 없는 정치로 전락한다.
요즈음 부쩍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상서롭지 못한 현상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울었고 박근혜 대표와 허준영 경찰총장이 울었다.
운 이유는 각기 달랐지만,한스럽고 암담한 현실 앞에 눈물을 흘렸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김 추기경은 믿음과 정직함이 없는 세태에,박 대표는 사학법 여당 단독처리에,허 청장은 폭력시위 진압과정에서 희생양이 된 것이 서러워 울었다.
정치란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고 일찍이 간디가 말했던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다면,그것도 항상 우는 '울보',평강공주가 아니라 좀처럼 울 것 같지 않던 공인들이 연이어 운다면,그 눈물을 닦아주는 노력은 누가 해야 할 것인가. 권력을 가진 정부와 여당이 아니겠는가. 인사권과 재정권을 행사할 때만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정작 이유있는 눈물들이 사방에서 흐를 때 '모르쇠'로 일관한다면,비정한 정치권력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이들은 단독으로 법안을 통과시키고 또 정치희생양을 만들고서도 의기양양해 혹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산안 등 20여개의 안건은 일사천리로 통과됐으나,우리 정치는 그 속도만큼이나 쪼그라들었고 초라해졌다.
이렇게 되면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더 많이 나올는지 모른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많고 그 눈물을 닦아주려는 사람이 없는 척박한 우리의 현실,이것이 앞으로 험난한 병술년 정치의 전조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