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왕의 남자'의 반란

이정환 영화계에서는 요즘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 자주 들린다. 한국영화사의 최대 이변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영화계에서 오랜 기간 일했던 사람들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도대체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준익 감독이 만든 영화 '왕의 남자'가 그 진원이다. '왕의 남자'는 지난해 12월29일 전국 255개 스크린에서 개봉되면서 관객과 만나기 시작했다. 당시 경쟁작이었던 '태풍'이 540개 스크린,'킹콩'이 375개 스크린을 점령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초라한 출발이었다. 제작비를 봐도 그렇다. 배우 개런티나 촬영 녹음 등에 필요한 순제작비 44억원,마케팅비 23억원을 합해 총 67억원이 들어갔다. 이에 비해 '태풍'은 순제작비 150억원,마케팅비 50억원 등 총 200억원이 투입됐고 '킹콩'에는 무려 2070억원의 제작비가 소요됐다. 그렇다고 흥행성 높은 배우를 쓴 것도 아니다. 감우성 정진영 강성연 이준기는 연기력이라면 몰라도 흥행성에서 A급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이들이 한국 최고의 스타파워를 지녔다는 장동건 이정재(태풍)에 겁도 없이 맞섰던 셈이다. 그 결과는 의외라고밖에 할 수 없게 나오고 있다. 개봉 4주차인 지난 19일 현재 '왕의 남자'는 550만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들였다. 2주나 먼저 개봉한 '태풍'의 420만명,'킹콩'의 410만명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있다. 개봉 스크린 수를 감안하면 대단한 기록이다. 이런 상황이니,영화계에서 이변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왕의 남자'가 폭발적 인기를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연산군 시대의 역사와 왕을 포함한 남자들의 삼각 사랑이라는 허구를 사회현실과 잘 접목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질 않는다. 현 세태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는 해석도 뭔가 미진한 것 같다. 인기의 이유는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했던 참신한 접근방식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감독은 원작 연극 '이'의 스토리를 빌려온 후 거기에 영화적 특징을 덧입혀 멋지게 변주해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수없이 우려먹은 연산군시대라는 만만치 않은 소재를 다루면서 지금까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한 단면,즉 '자유를 갈망한 광대들의 사랑과 슬픔'을 살짝 집어올려 밀도 있고 감칠맛 나게 요리해낸 것이다. 이 같은 접근방식은 '친구'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아류 조폭영화가 쏟아져 나오고,막강한 스타를 동원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흉내낸 대작들에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붓는 것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특히 영화계의 관심을 온몸에 받으며 상영된 '태풍'의 흥행이 기대에 못미쳤다는 것은 또 다른 시사점을 던져준다. 우리 영화관객의 수준이 한 단계 도약하고 있다는 조짐이다. 그것은 한때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대작에 열광했던 우리 관객들이 그와 비슷한 코드로 만들어진 영화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는다는 징표다. 그런 점에서 '왕의 남자'가 일으킨 것은 이변이 아니라 일종의 '반란'이다. 기존 영화의 접근방법이나,블록버스터에 스크린을 몰아주는 현 배급체계를 독창성과 새로운 감각으로 극복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 반란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