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스페셜] 아파트 부녀회장 잡아라


지난달 중순 서울 강남지역의 한 아파트 단지.부녀회가 주최한 이웃돕기 바자행사에 전·현직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과 지방선거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예비 선량들이 총출동했다.


이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값나가는 물품을 사준 덕에 바자 매출은 부녀회의 당초 목표를 초과했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녀회가 정치권의 집중적인 '러브 콜'을 받으며 한껏 상한가로 치닫고 있다.


특히 지역구 여론 형성에 중요한 작용을 하는 부녀회장에 대한 정치인들의 대우가 달라졌다.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아파트의 경우 개별 가구별로 접근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부녀회가 의원과 주민 간 의사 소통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며 "특히 부녀회장은 각종 봉사활동을 통해 여러 단체에 가입돼 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하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부녀회장이 지역구 여론 형성의 정점에 있다는 데 이견을 달지 않는다.


또 다른 의원 보좌관은 "의정설명회나 하다못해 후보를 홍보하는 광고물을 알리려면 부녀회장을 통하지 않고서는 힘들다"며 "국회의원들은 합법적인 선거운동인 의정보고회를 갖기 전에 부녀회장단과 장소 및 일정 등을 협의하는 것이 관례화돼 있다"고 밝혔다.


지방선거철이 다가오면서 부녀회가 주최하는 각종 행사에 지역구 의원들의 발길이 부쩍 잦아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인 셈이다.
유통업계로 눈을 돌리면 부녀회장들의 '끗발'은 '권력' 수준으로 껑충 뛰어오른다.


지난달 24일 이마트 수원점 점장실에서는 인근 아파트 부녀회장단 30여명이 점장에게 날카로운 질문 공세를 벌였다.


한 부녀회장이 "요즘 들어 과일 신선도가 다른 점포에 비해 떨어지는 것 같다"고 몰아붙이자 점장은 "해당 바이어에게 즉각 조치하도록 하겠다"고 해명하며 진땀을 흘렸다.
이날 모임은 이마트 수원점이 매달 한 번씩 갖는 '부녀회장과의 간담회'.대화 내용이 경영전략회의를 방불케 할 정도로 시종일관 진지했다.


할인점 점장들은 이 밖에도 인근 부녀회장과 '핫라인(hot line)'을 만들어 수시로 의견을 들으며 주부들 사이의 '입소문' 관리에 공을 들이고 있다.


부녀회장단을 대상으로 매달 두 차례 '고객 품평회'를 실시하고 있는 이마트 수원점 영업팀 관계자는 "과일 야채 등 신선식품 위주로 다른 회사 제품까지 포함한 블라인드 테스팅(blind testing)을 하고 있다"며 "설문 결과는 해당 바이어에게 곧바로 통보된다"고 말했다.


신규 점포가 들어설 때면 부녀회장단의 '파워'가 더욱 위력을 발휘한다.


예컨대 지난해 12월 문을 연 홈플러스 구미점의 경우 개점 한 달 전에 점장이 부녀회장단과 함께 매장을 미리 둘러보고 조언을 구했다.


부동산 시장에 미치는 부녀회장의 영향력도 정치권이나 유통업계 부럽지 않을 정도다.


한 건설업체 관계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지역에선 '다른 건설사들은 야외조명을 설치하고 평당 나무를 세 그루씩 심어놨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달라'는 식의 민원이 부녀회를 통해 자주 들어와 곤란을 겪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부녀회장 파워'가 남용돼 집값 담합 등 부작용을 빚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부녀회장들이 인근 중개업소들과 공동 전선을 구축해 아파트 시세 형성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최근 신축된 서울 종로구 A주상복합의 경우가 단적인 예다.


인근에 비교할 만한 '물건'이 없자 부녀회와 공인중개소가 담합,초반 시세를 과도하게 올려놓아 주변의 눈총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부녀회장들은 이처럼 폭넓은 활동 반경에 힘입어 본격 사회 활동에 나서기도 한다"며 "소비자 모임이나 여성단체 대표 중에 부녀회장 경력을 가진 사람이 꽤 많다"고 말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