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진정성 의심받는 한미 FTA

정규재 < 경제교육연구소장·논설위원 >

노무현 대통령이 "참여정부는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말했을 때의 당혹감은 우리 사회가 던져놓고 있는 한꾸러미 시대착오적 이념 퍼즐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소위 '시장주의자'들조차 쉽게 동의할 수 없었던 급작스런 한·미 FTA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직 3년에 많이 달라졌다"고 순진한 평가를 내리기엔 석연치 않은 요인들이 많다.

더구나 노 대통령은 생각이 복잡하고 전략적 사고에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대통령의 발언이 있은 이후 연일 한·미 FTA를 주제로 세미나가 열리고 정부나 연구기관들도 자료를 쏟아내지만 개방론자들조차 뜨악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WTO의 다자간 협상구조와는 달리 FTA는 분명 양자간 협상이다. 그러나 상대가 미국이고 보면 칠레와의 협상과 결코 같을 수는 없다. 개방할 수 있는 부분만 개방하면 그만이라고는 해도 상대가 세계 최강인 미국인데다 협상 테이블에 오르는 분야도 제조업 농업 서비스 문화산업 등 경제 전반에 걸쳐 있다. 심도와 복잡성에서 칠레와 비길 수 없다. 노 대통령의 속내를 몰라 당황해 하는 것이 정부 관료들만도 아닌 것은 협상을 둘러싸고 벌어질 이념 투쟁과 그것이 가져올 정치적 혼란 때문이다.

한·미 FTA가 국가 운영에 대한 고뇌로서가 아니라 집권 후반기를 설계하는 정치적 책략으로서 기획된 것이라면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노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보다 좌파 지향성이 뚜렷하다.

김대중 대통령의 금융시장 개방과 노 대통령의 FTA가 겹쳐 보이는 것은 그래서 단순한 착시는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 중에 거칠 것 없는 금융시장 개방이 이루어졌다.금융시장 개방은 우파 정책의 종착역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의 핵심 항목이다.

외환위기 수습 과정에서 불가피했던 일이라고는 해도 시중은행의 지배주식 80% 이상을 외국에 넘긴 나라는 한국말고는 없다.

김 대통령은 왜 그같은 선택을 감행했을까.

결과론적 분석이지만 금융시장 개방은 김대중 대통령이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해가는 좋은 발판이 되었다.

김 대통령이 북한을 찾아가 6·15 남북공동성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금융시장 개방,보다 포괄적으로는 IMF 프로그램을 따라 국제사회,특히 미국과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전 정지작업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좌파 신자유주의 운운하면서 한·미 FTA를 화두로 던졌을 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노 대통령도 남북 정상회담을 하고 싶은 것인가"하는 질문이었다.

이 불경한 질문은 노 대통령이 몽골을 방문한 다음에야 비로소 답이 나왔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지지기반 그룹들이 극력 반대하는 한·미 FTA를 임기 후반부에 서둘러 추진할 까닭이 없다.

한·미 FTA는 강력한 노조와 스크린 쿼터로 상징되는 소위 진보적 문화주의자들,그리고 전교조의 평등주의 교육 이념 따위를 전면 부정하는 바탕 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이들 분야야말로 노 대통령의 강력한 권력 기반 아니던가.

대통령은 과연 진심으로 개방과 경쟁의 논리를 세우고자 하는 것인가.

불행히도 평소에 그와 관련해 보여준 것이 전혀 없다.

더구나 사회 세력관계는 참여정부 하에서 오히려 그것에 역행하는 힘을 극대화해 놓은 터다.

지금과 같은 비이성적 이념지도 하에서,그리고 퇴행적 세력관계 하에서는 협상 과정이 순조로울 리 없다.

반미 감정은 확대 재생산되고 사회는 통합 아닌 분열로 나아갈 가능성이 더욱 크다.

김대중 대통령의 과도한 금융시장 개방이 오늘날 극단적인 외자 혐오감으로 중폭되고 있듯이 준비 없는 한·미 FTA는 역설적이게도 경제적 쇄국주의를 강화할 수도 있다.노 대통령은 한·미 FTA 협상을 연출하면서 진정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인지.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