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아! 고구려"의 함정

李濟民 < 연세대 교수·경제학 >

고구려 드라마가 붐이다. MBC의 주몽이 드라마 사상 손꼽히는 시청률을 자랑하고,KBS의 대조영,SBS의 연개소문도 사극으로서는 예외적으로 높은 시청률을 보이고 있다. 광개토대왕을 주제로 한 사극도 곧 나올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 드라마가 왜 이렇게 인기인가. 드라마로서 잘 만든 것이 첫째 이유겠지만 고구려 자체가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 그렇게 만들고 있지만,더 근본적으로 한국인의 정신세계 때문인 것 같다. 지금 대다수 한국인은 근세 500여년을 지배한 조선의 문약(文弱)함과 사대주의보다는 그 이전 역사에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고 싶어 하는 것 아닌가. 그 중에서도 한반도 북부와 만주를 바탕으로 세계의 중심국 중국에 맞서 당당했던 고구려의 진취적 기상과 용기가 한민족의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제 국운이 이만큼 폈으니 만주의 고토(故土)를 되찾아 한번 큰소리치고 살아보자는 생각도 없지 않은 것 같다.

만에 하나 정말로 한국이 그렇게 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중국과 충돌할 것은 뻔한 노릇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대다수 한국인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고구려 의식'은 그런 점에서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21세기 한국이 가야 할 방향에 비춰볼 때 더욱 문제다.

21세기 한국이 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두말할 것 없이 '세계로 향해 열린 통상국가'다. 한국인이 세계로 뛰어나가야 할 뿐 아니라 외국으로부터 우수한 인력과 자본을 끌어들여 이용할 줄 아는 그런 국가다. 역사적으로 그런 식으로 이름을 날린 통상국가가 영토가 넓은 대륙국가인 적은 없었다. 중세 서양의 대표적 통상국가인 베니스는 인구 10만여명의 도시국가였고,16세기 세계의 바다를 주름잡았던 포르투갈은 인구 150만명밖에 안되는 소국이었다. 17세기 바다의 왕자 네덜란드 역시 인구가 150만명에 불과했고 영토는 한반도의 5분의 1 규모였다. 18세기 이후 세계를 지배한 통상국가 영국도 유럽 국가 중에서 결코 규모가 큰 나라는 아니었다. 한국은 지금으로서도 인구가 5000만명에 가깝고 통일하면 7000만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나라다. 역사적으로 이름을 날린 통상국가처럼 되는데 규모가 작아서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나라의 크기가 아니라 이들 통상국가를 성공으로 이끈 사고방식과 전략이다. 이들 국가가 성공한 것은 넓은 영토나 많은 인구 때문이 아니라 세계 질서를 읽는 능력,강국 사이에서 살아남는 유연한 사고,비즈니스 능력을 높게 사는 사회적 인정구조(認定構造) 등 때문이었다.

당장 직면하는 경제적 현실 문제도 있다. 자신보다 가난한 이웃을 끌어안으면 손해가 되는 것이 현대 경제의 실정이다. 그런 이유로 다른 선진국에서는 부유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와 한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을 꺼린다. 이미 한 나라가 되어 있는데 분리를 원하는 경우도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부유한 북부지역이 가난한 남부 지역으로부터 분리하기를 원한다. 벨기에 같은 나라도 마찬가지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가난한 지역을 먹여 살려야 하는 현실이 못마땅한 것이다.

앞으로 한국도 통일과정에서 비슷한 경험을 할 가능성이 크다. 통일이 어떤 형태를 띠는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북한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한국 납세자는 허리가 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런 사정 위에 만에 하나라도 가난한 만주의 고구려 고토까지 끌어안는다는 생각을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고구려를 자기 역사라고 우기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터무니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한국인의 "아 고구려!"식(式) 사고방식도 너무 실속이 없는 것 같다. 지금 한국인이 진취적 기상과 용기를 발휘해야 할 곳은 따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