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살타첼로의 밀양아리랑

金正浩 < 자유기업원 원장 >

한때 우리나라에는 각 지방을 대표하는 소주 브랜드들이 있었다. 강원에는 경월,대구에는 금복주,경남은 무학,전남은 보해소주가 그랬다. 이러한 지방색 또는 다양성은 자도(自道) 소주 구입명령제도 때문에 생겨났다. 각 지역의 소주 판매업자들은 50% 이상을 그 지역의 독점 소주업자가 만든 것만 판매해야 했고,그러다 보니 지방마다의 고유한 소주가 자리잡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다양성은 모양에 불과했다. 강릉 사람은 경월 이외의 것을 마실 수 없었고,전남의 소비자에게는 보해뿐이었다. 진로를 마시고 싶어도 경남 사람은 무학만 마셔야 했다. 다양한 지방색에도 불구하고 정작 각 지방의 소비자들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단조롭기 짝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1996년 12월 이 제도가 위헌 판결을 받고 폐지되자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지역의 보호막이 깨지면서 소주업체 간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소주 업계의 판도는 전통적 강자였던 진로와 인수합병을 통해 새로 등장한 두산의 양강(兩强) 구도로 재편돼 갔다. 이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보면 과거와 같은 다양성은 사라졌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좋아졌다. 그 덕분에 소비자들이 회식 자리에서 선택할 수 있는 소주의 종류는 정말 다양해졌다. 처음처럼,참이슬,그린소주,산,C1 등 그 이름을 이루 다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사정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장벽이 사라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모든 지역의 소비자들에게 자기 지방에서 생산된 것 외에 수많은 다른 선택들이 가능해졌다. 지방색이 사라진 결과 대부분의 소비자가 과거보다 훨씬 다양한 선택의 폭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은 문화 다양성이라는 것에도 똑같이 나타난다. 스크린쿼터 같은 것으로 나라마다 영화의 장벽을 쳐 놓으면 각 나라마다 고유의 영화가 생길 것이다. 한국에는 한국영화,중국은 중국영화가 생겨나고 각 나라의 영화들은 매우 독특한 특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영화 마니아나 생산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을 영화의 다양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중국 사람은 중국 영화만 봐야 하고 한국 사람은 한국 영화만 봐야 하는 것은 다양성(多樣性)이 아니라 단조로움일 뿐이다.

소비자가 원하지 않는 다양성은 다양성이 아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영화 10편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모두가 보고 싶어하는 영화 두 편을 만들어내는 것이 소비자들에게는 더 의미있는 다양성이다.

게다가 한국 문화 상품의 생산을 한국인이 꼭 맡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의 문화시장이 커질수록 외국인들도 한국인의 취향에 맞는 상품을 생산하기 시작할 것이며,그런 일은 이미 시작됐다. 된장과 김치를 즐겨 먹는 독일의 5인조 재즈밴드인 살타첼로는 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옹헤야 같은 곡을 재즈로 재해석해서 한국인의 귀를 즐겁게 하고 있다. 세계적 색소폰 연주자 케니지는 우리나라의 대중가수 임재범과 박정현의 듀엣곡 '사랑보다 깊은 상처'를 레퍼토리에 넣어서 한국의 팬을 늘려가고 있다. 또 다른 앨범에서는 팝페라 가수 임형주와 함께 연주한 '하월가'를 수록하기도 했다. 외국인 문화 상품 생산자들 덕분에 한국인은 더 다양한 한국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된 셈이다.

가수 겸 제작자인 박진영과 '비'가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미국의 흑인 음악을 만들어 성공을 거두고 있듯이 외국인이 한국인만을 위한 영화와 음악을 만들어 진출한다고 해서 이상하게 봐야 할 것이 없다. 태권도와 김치가 이제 한국인만의 것이 아니듯이 한국의 문화도 이제 한국인만의 것이 아니다. 한국의 성공이 크고 깊어질수록 한국제 TV나 휴대폰처럼 눈에 보이는 상품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도 세계인들의 생활 속으로 퍼져나갈 것이고,그들도 한국 문화 상품을 생산할 것이다. 외국에서 만들어진 한국 문화 상품에 국경과 마음을 열수록 우리는 문화 소비자로서 더 풍부하고 다양한 한국과 세계 문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