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장영실 얼굴'로 이공계 살아나나

李悳煥 < 서강대 교수·과학커뮤니케이션 >

새로 발행되는 고액권 화폐에 넣을 초상의 주인공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다.과학계,여성계,독립유공자 단체,역사학계,정치권이 모두 나서서 자신들이 원하는 인물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새 화폐에 우리 과학자 얼굴 올리기 운동'도 있다고 한다. 장영실,김구,정약용,신사임당,광개토대왕,유관순 등이 거론되고 있다. 우리 화폐에 초상을 넣어도 좋을 만큼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화폐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대단하다.

화폐에 들어가는 인물이나 도안은 우리의 가치관,세계관,역사관을 반영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 모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인물,유물,자연의 모습을 사용한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화폐는 우리 모두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장영실도 결코 나쁜 선택일 수가 없다.세종 때의 과학자였던 장영실은 뜻깊은 인물이다.

우선 장영실은 기생의 소생으로 동래현의 관노(官奴) 신분에서 종3품 상호군(上護軍)의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立志傳的) 인물이다.

그의 천부적인 과학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결과였다.세종대왕의 특명으로 발탁되었던 그는 자격루,해시계,측우기,수표,각종 천문의를 비롯한 과학기기를 만드는 일에 앞장섰다.

장영실이 최고의 과학자로 존중받기에 충분한 업적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

다만 장영실의 일생에 대해 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런 장영실의 초상이 고액권 화폐에 새겨진다면 과학기술계의 입장에서는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불필요한 환상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시 말해서 새로 발행되는 고액권에 장영실의 초상이 새겨진다고 해도 실제로 달라질 것은 많지 않다.

공연히 환상으로 들뜨면 실망만 커질 뿐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미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과학 지폐'를 가지고 있다.

얼마 전에 발행된 1만원권 지폐가 바로 그것이다.

1만원 권 새 지폐에는 조선의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천문관측을 통해 계절을 알아내는 천문시계인 '혼천의'(渾天儀),그리고 우리나라 최대의 천체망원경인 '보현산 천문대 광학망원경'이 새겨져 있다. 우리 선조가 남겨준 소중한 과학 유물과 함께 현대의 첨단 과학 시설이 모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과학 지폐다.

우선 우리 과학자들이 그런 1만원권 지폐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도안의 의미를 어설프게라도 알고 있는 과학자를 찾기도 쉽지 않다.

혼천의의 도안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과학자도 드물다.

더욱이 그런 논란의 내용을 짐작이라도 하는 과학자는 정말 드물다.

과학 지폐가 발행되었다고 우리 사회의 과학에 대한 인식이 개선된 것도 아니다.

물론 이공계 기피가 개선되고 있다는 징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기막힌 수능(修能) 등급제 탓에 '수리 가'형을 선택하는 학생은 더욱 큰 폭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가슴 아픈 소식만 전해지고 있다.

정부가 과학과 수학은 물론이고 국어 교육까지도 포기해버린 '새 교육 과정'을 개정할 움직임도 없다.

이제는 이공계 기피가 아니라 이공계의 완전한 붕괴를 걱정해야 할 심각한 형편이다.

이공계 기피의 본질은 '우수한' 학생이 이공계를 외면하는 것이라는 정부 주장이 더욱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고액권에 장영실의 초상이 새겨진다고 우리의 안타까운 사정이 바뀔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도 순진한 생각이다.

물론 미리부터 포기해 버릴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목숨을 걸고 싸울 만큼 중요한 일도 아니다.

또 반드시 과학자의 초상을 써야 한다는 논리적인 근거를 찾을 수도 없다.설득력이 없는 어설픈 논리를 앞세워서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우리 국민 모두에게 과학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인식시키는 일이 더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