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법을 생각한다

朴孝鍾 < 서울대 교수·정치학 >

우리말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어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법'이란 말이다.사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우리는 곧잘 "그러는 법이 어디 있소?"라고 힐문(詰問)한다.

그러면 그것을 반박하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사람은 "내가 그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단 말이오?"하고 항변한다.

아닌 게 아니라 바로 그 '법'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노무현 대통령이 "그놈의 헌법"부터 시작해 공직선거법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헌법소원을 내니,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대통령이 그러는 법이 어디 있소?"하고 불만을 터뜨린다.

대통령과 청와대는 "대통령이라고 해서 헌법소원을 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응수하고 있다.

'법'이란 어떤 것인가.예로부터 법이란 최고의 가치를 갖는 지엄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들은 성벽을 위해 싸워야 하듯이 법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설파했다.

전투를 앞두고 비교적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인 스파르타 전사(戰士)들의 태도에 궁금해진 페르시아 왕 크세르케세스가 질문을 하자마자 귀화한 스파르타인이 "법,그것은 당신의 국민들이 당신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전한다.물론 법에 대한 복종을 절대시한 그런 전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가운데 등장하는 안티고네는 반역을 저지른 오빠의 시체를 장사 지내지 말라는 크레온왕의 엄명에 대하여 "제우스의 법이 아닌 불의한 법"이라며 항변한다.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법에 부조리한 요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왜 고속도로 운전자는 제한속도 100km를 넘겨서는 안되는 것일까.

교통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시속 120km 혹은 150km로 해야 할 곳도 적지 않은데,일률적으로 100km로 규제를 하니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범법자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음주운전 측정도 마찬가지다.

주량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말술을 먹어도 취하지 않는 '두주불사형'이 있는가 하면,밀밭에 가기만 해도 취하는 '맹물형'이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오히려 미국처럼 교통경찰이 재량권을 갖고 판단을 하게 하면 훨씬 더 합리적일 터이다.

음주를 했다고 의심이 가는 사람에게 차에서 내려 걸어가라고 한 다음 비틀거리면 그때 체포해서 면허증을 압수해도 늦지 않다.

간통처벌법도 마찬가지다.

간통은 사적(私的)인 신의의 문제인데,정부가 개입해서 미풍양속을 어긴다고 다스리려고 하니 편법이 난무한다.

위자료를 듬뿍 받아내려고 간통현장을 잡아 소송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처럼 부조리한 법,불의한 법을 꼽으라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법을 따르는가.

사실 100% 불의한 법이란 없다.

다만 옳은 것과 불의한 것이 뒤섞여 있는 '혼합법'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사형제도의 존치논쟁과 같다.

사법적 정의를 위해서는 사형제도를 존치시켜야 한다는 사람의 주장도 맞고 또 공권력이라도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권한은 없다며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사람의 주장도 맞다.

이 두 개는 부분적으로 옳고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을 뿐,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옳고 절대적으로 틀린 것도 아니다.

법의 '규범적 불확실성'이란 그런 것이다.

2500년 전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전사들은 시인 시모니데스의 시구를 통해 "우리는 스파르타의 법에 순종해 여기에 누워있노라"며 외치고 있다.

레오니다스가 누구인가.

스파르타의 왕이면서도 스파르타의 법에 헌신하다 비장하게 최후를 맞은 통치자가 아닌가.

죽음을 요구한 법에 순종하여 목숨을 바친 왕도 있는데,기껏해야 선거중립을 요구한 법이 문제가 된다고 해서 불복을 하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앞장서서 법을 지키고 모범을 보여야 할 최고 통치자가 법을 공격하고 나서는 일은 과히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모름지기 노 대통령은 "대통령이 그러는 법은 없다"는 민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